낙원의 저쪽(상) - 백휴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제1부 사랑 1. 제2의 고향 2. 순결 3. 연정(戀情) 4. 비둘기의 죽음 5. 불감증 환자 정은경 6. 자유 연상법 7. 돈 후안의 사고방식 8. 형사와 살인용의자 9. 거부 못할 편지 10. 불청객의 인동하 11. 효진의 실종 12. 불안한 고독 13. 충격적인 고백 14. 비디오 테이프 15. 어머니 16. 논쟁 17. 고독의 방 제2부 죽음 2부로 넘어가면서 1. 광기 2. 악마의 화신 작가 소개 - 1984년 서강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86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수료 - 현재 추리작가협회 회원 - 지은 책으로는 장편추리소설로 <사프의 비밀> <장미 벼랑에 서다> 단편추리소설로 <잃어버린 시간>외 <초상화를 그리는 남자>외 등이 있다. 작가의 말 성욕과 편집광, 그것은 한번쯤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싶은 주제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상승할수록 양자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전자가 본능의 해방이라면 후자는 왜곡된 방어이다. 해방과 억압, 그 또한 영원한 미해결의 숙제일 수 있다. 인생의 긴장을 위해 어느 선에서 현(弦)의 강도를 조절할 것인가-- 습관의 타성이 몸에 밴 자가 아니라면 그런 문제로 고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을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많은 인용과 차용은 학자들의 이론을 소설의 구조에 맞게 빌어쓴 것이다. 논문이 아니기에 굳이 주(註)를 달지 않은 점은 양해를 바란다. 한가지, 하권(下卷)에서 주사파(主思派)를 해석할 때, 황인욱 씨에 관한 주장이 너무 자의적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황인욱 씨는 이 소설이 출판되기 전, 감옥에서 캡슐 속에 담긴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된 바, "주체의 신념은 환상이었다"는 고백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내 해석이 쓸모가 없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글이 시종일관 지어낸 얘기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그러진 심리를 완전히 떨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과 충고를 아끼지 않은 김영아 씨 그리고 김인종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백 휴 제 1 부 사랑 1. 제2의 고향 내가 대구에 '로이드 정신병원'을 개원하였을 때 대학 동기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힐책했다. "도대체가 너 돈을 벌려는 욕심이 있는 거냐?" "살기 좋은 서울 놔 두고 그 더운 대구까지 뭣하러 내려가냐?" "어차피 지방을 택하려면 풍광명미하거나 공기라도 맑아야지 대구나 서울이나 대도시라 혼탁하고 각박하기는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도망치듯 대구에 내려온 것은 그런 동료들과 뒤섞여 어울리기가 질색인 탓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끼리끼리 모여 떠들어대는 것을 싫어했다. 적당히 성공하고 적당히 나이가 든 부류들이 인생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에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친목회 모임이나 직장동료 회식 같은 장소를 꺼려하는 나의 성격은 서울에서도 여러 곳을 전전하게 만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물려주신 유산이 아니었다면, 조직의 생리를 못 견뎌하는 나로서는 사회에 적응하기조차 힘들었을지 모른다. 레지던트 경력을 청산하자마자 나는 또래에 비해 일찌감치 진료소를 차렸다. 그게 그만 29살 때인 6년 전으로, 그때만 해도 정신병원이라면 돌연변이나 별종들만 찾아드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 탓에 적자 없이 병원을 꾸려 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한곳에 오래 붙박혀 살지를 못하는 나의 기질과 어우러져 다섯 곳이나 돌아다녔다. 동숭동의 대학로, 한강변의 외인 아파트촌, 전농동의 산업대 근처, 봉천동 등등...... 대구행은 어찌 보면 장기적 전망이 결여된 무모한 짓이었지만, 나로서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이 앞서는 일이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발목이 잡혀 있던 꼴보기 싫은 애인에게서 떠나 새 애인의 품으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대구에서의 요식절차--병원자리와 살 집을 물색하고 나를 도와 줄 간호사를 채용하는 일--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병원의 위치였는데, 남구 대명동에 자리잡은 K대의 후문 쪽은 마음에 썩 흡족했다. 이 소리를 듣는다면 그 학교 수위가 당장 쫓아올지 모르겠으나, 대학교정은 적절히 활용만 하면 일반인에겐 다시 없는 휴식처요 공원인 셈이다. 여름이 말미에 접어들어 바람이 선선해지는 초저녁, 대학 캠퍼스를 걷는 것은 내게 더없는 유열감을 안겨 주곤 했다. 내가 알기로는 K대의 교정은 규모가 아담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돋보이게 꾸며져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드물게 보이는 도리스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들이었다. 건물 입구엔 열 개 내지 열두 개의 거대한 석주(石柱)들이 수십 년 세월의 풍상을 견뎌 낸 빛바랜 품위를 뽐내며 출입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프로이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석주의 양끝 폭이 좁고 가운데가 불룩한 형태를 취했으므로, 그것들이 성기들의 일렬종대 같아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다. 그것들이 성기라면 어딘가에 그 대극물(對極物)이 있을 거라는 나의 짓궂은 상상력이 발동했다. K대에 드나든 지 보름 만에 운 좋게도 음(陰)의 터밭(田)을 발견했다. 아니 어쩌면 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밑독 빠진 허무맹랑한 상상은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운동장을 마주보며 위치한 노천강당이었다. 나는 몇 번인가 거기 앉아서 허심한 사색에 빠져 들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어둑할 무렵 단상 위에 올라가서 내가 막 떠나왔던 자리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 노천강당은 정확히 반달꼴이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월경(月經)의 주기를 달의 기울기 차는 현상에 비유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라면 나는 오히려 풍만하고 농염한 중추절의 만월(滿月)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노천강당을 바라보며 고대의 달의 여신(이집트 Isis따위)과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꿈꾸었다. 자궁에 반달을 갖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의 미희들. 결국 나는 원초적 유토피아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늦은 밤 잠들기 전 대학노트 뒷장에 끄적거린 사색과 숙고의 편린이 아직 어렴풋이 내 기억에 새겨져 있다. '......나는 몽상가이다. 몽상가는 낙원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엔 포근한 자궁의 비밀이 있다. 그 끔찍한 질환과 정신병, 구제불능의 광기, 불안, 공포가 말끔히 제거된 세계! 동화에 그려진 일곱 색깔 무지개가 뜨고 어머니의 손길이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흡사 양수의 바다를 헤엄치는 듯한 안온함......' 나는 그 후로 K대학의 교정을 제 2의 고향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맵시 있는 날개를 푸드득대며 건물과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던 비둘기 떼들이었다. 몸체와 대가리는 칙칙한 잿빛이고 목줄기에만 보라색 바탕에 초록빛이 섞여 든 잡종 비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순결의 화신처럼 보였다. 순결의 화신! 나는 병원의 위치를 선정한 다음 나름대로 내부 장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자부하는 바, 입구엔 성인 남자의 평균 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큰 성모마리아 석고상을, 그곳에서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벽엔 순결(純潔)이라는 휘호가 쓰인 액자를 걸어 두었다. 순결은 일종의 원훈(院訓)이었다. 어떤 환자는 코딱지만한 병원에 주제넘게 무슨 원훈이냐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병원을 처음 개업할 때부터 아끼던 글귀라 대구에 내려왔다고 해서 그것을 걷어치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오해는 없기 바란다. 나는 독실한 종교인은 아니다. 대학 시절, 도강을 하며 종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학기말 때쯤이면 어김없이 천박한 호기심으로 변질된 한 줌 열정을 느낄 뿐이었다. 이를테면 구약의 '에스겔'은 우주선이 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한 장면이었다든지, '창세기'의 '사람의 아들'이란 거인종족의 후손이었다든지, 더 조잡하게는 화염방사기를 휘두르던 천사를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성서를 장난기로 보아넘겼던 것만은 아니다. 나는 '마르코'와 '마태오'를 일곱 번, '요한 묵시록'을 열두 번이나 읽었고 성서 전체를 통털어서 읽지 않은 것은 '하바꾹'과 '즈가리야' 정도였다. 하긴 그것이 하도 오래 전이어서 그 내용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낙인된 문면(文面)은 '레위기' 15장 19절부터 30절까지의 기록이다. '여자의 몸에 생긴 부정(不淨)을 벗는 예식'이란 표제가 붙은 그 기록이 여자가 월경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하혈 8일째 되는 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 사제에게 갖다 드려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 사제는 야훼 앞에서 여인의 하혈로 부정탄 것을 벗겨 준다는 것이다. 하혈에 왜 하필 비둘기인가? 레위기를 읽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이유를 조사한 바는 없지만, 비둘기를 떠올릴 때마다 평화보다는 순결의 이미지가 강하게 되살아나 그 동물을 가까이 하고 싶은 욕구가 못 말리게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절제되지 못한 그런 욕구는 알게 모르게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나는 대구에 내려오자마자 친분이 있던 대학병원 전문의에게 쓸만한 간호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찾아온 지망자는 5명이나 되었다. 한결같이 야생마 같은 젊은이들답게 요란한 화장에 싱싱한 허벅지를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호되게 나무라며 명일까지 수수한 차림으로 와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나타난 지망자는 두 명으로 줄었다. 그들마저 내게서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느꼈던지 떫어하는 눈빛에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뗀 채로 면접에 들어갔다. 먼저 대면한 아가씨는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에 신경질적으로 생겨먹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정신병원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냥 미친 사람이 걸리는 병 아닌가요." "연상되는 게 있으면 아무 거나 말해 봐." "광기, 꽥꽥 질러대는 소리, 권총 자살 그리고 버드나무가 생각나요." "버드나무?" "어릴 때 동네 언니가 속치마 바람으로 수양버들에 올라가 온동네 사람들을 끌어모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몇 살 때야?" "예닐곱 살쯤 되었을 거예요." "그때 느낌은?"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었어요. 다음날 학교에 가 보니까 남자애들이 그 언니 흉내를 내며 놀려대더군요." "그 언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나?" "아, 아뇨." "고향에서 지금 또다시 그 언니와 마주친다면 어떡할 테야?" "글쎄요...... 그 언니 죽었다고 들었는데." "만약에 말이야." "경찰이나 공공기관에 신고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겠죠." "좋아, 그럼 이번엔 융(Jung)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 "융이 누군가요?" 뻔뻔스러운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채용하려고 했던 나는 그 무지한 대꾸에 깊이 실망하고 말았다. 다음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나가 보았다. 살결이 뽀얀 매력적인 처녀였다. "몇 살인가?" "스물둘이에요." "예쁜 얼굴이군. 학교 다닐 때 남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정규 학교는 다니지 않았어요. RN(Registered Nurse)코스를 밟았어요." "RN이라...... 어디서 많이 듣긴 들었는데 그게 몇 년제지?" "능력에 따라 2년도 다니고 3년도 다니기도 해요. 실습 위주의 학원이에요." "거기에도 남학생은 있었을 거 아닌가?" "물론이에요." "왜, 인기가 없었나?"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 평가는 본인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애인은 있나?" "네, 있어요." "얼마나 사귀었지?" "한 2년 넘었어요." "사랑하나?" "좋아는 해요? 아직 결혼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구요." "그 친구와 성관계는 맺은 적이 있나?" "어, 어머......" 안 그래도 내 질문에 조금씩 당황하던 아가씨는 마침내 창백한 얼굴이 되어 눈살을 찌푸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정신병원에 근무하려면 그런 정도의 짓궂은 질문은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다. 나는 간호사가 지시약을 조제하고 잔무를 처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료에 적극 끼어들어 의논상대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므로 융이 누구인지 들어보지도 못하거나 성(性) 소리만 나와도 기겁을 하는 간호사와 일을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곡절로 인해 간호사의 채용이 열흘이나 늦춰지는 동안 나는 수납계 여직원--환자의 보험 처리와 청소, 경리를 맡을 것이다--을 먼저 들였는데, 서둘러 구해서인지 역시 성에 차지는 않았다. 나도희(羅萄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가씨는 도대체가 몸매를 꾸미고 화장을 하고 뭇사내들의 끈끈한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 말고는 도통 취미라고는 없는, 머리꼭지부터 발가락 끝까지 백치미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스물서넛쯤 된 속물형의 철부지였다. 에어로빅 타이즈처럼 히프에 꽉 달라붙는 치마, 뒷굽이 10센티가 넘는 하이힐, 그로테스크한 긴 손톱, 지하철의 손잡이만한 귀걸이, 보라색 아이섀도 그리고 언제나 껌을 씹어댈 것 같은 입술과 수줍음 하나없이 꿰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것들이 내가 느낀 첫인상으로 세태가 요즘들어 표현에 주저하지 않고 부류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처할 지경이었다. 헌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덕의 법칙과 심리의 법칙은 전혀 별개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천박하다는 이유로 경멸할 수는 있으나,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흔히 부작용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왜곡된 정서의 억압이 이처럼 성본능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에게선 희박하다는(그래서 아마도 지식인 사이에서는 단순한 사람들은 영원히 정신분석 따위와는 인연이 없을 거라고 치부되지만) 경험에서, 정신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건강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적 금기가 심리적 파탄의 원인이 될 때가 있다. 한 예로 어떤 귀부인은 6.25때 남하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녀는 헌신적이었고 매사에 남편에게 복종했다. 아이들은 고급 교육을 받아 두뇌가 명석하게 성장해 갔으며 경제적 빈곤이 그녀의 인생에 방해가 된 적도 없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복력(福力)을 칭송해 마지않았으며 누가 견주더라도 그녀의 삶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유교의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철저히 얽매여 살아온 그녀로서는 스스로가 그런 상상을 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남편의 성적 무능이었다. 아이 둘을 낳자 기력을 잃고 시들해져 버린 생식기능...... 부부는 같은 방을 써 왔지만 언제부턴가 성적 교섭은 없었다. 남편보다 왕성한 성 능력을 타고난--그렇다고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다--그녀로서는 인고(忍苦)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두 아들에게서 보상받으려 했다. 그러자 성(性)은 다른 대치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식들에 대한 광적인 애착--사소한 마찰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끼며 두 아들을 단순히 기계처럼 부리고 지배하려 들었다. 그것은 병이었음에도, 그녀에게는 지고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만 여겨졌다. 그녀는 하루가 달리 공허하게 비워져 가는 자신을 느꼈던 만큼, 두 아들이 어엿하게 성장해서 자신들의 반쪽을 찾아 품에서 벗어나려 했을 때, 인생이 뒤집히는 듯한 배신감으로 분노했다. 그 순간 그녀의 정상적인 자아는 파멸되고 말았으며 마침내 두 아들이 결혼과 동시에 살림을 차려 나가자 격정적으로 폭발했다. 그녀의 병명은 '조발성 편집적 피해망상증'으로, 자신은 사악한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할 거라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그 부인이 하필 왜 그 시점에서 도덕적 방어기제와 와해되었는지 몹시 궁금했는데(내게는 두 아들의 결혼에 이은 분가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몇 주간 나를 사로잡던 의문은 곧 풀렸다. 그녀의 남편은 죽을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남편에게 성적으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잠재해 있던 성적 욕망이 일시에 인내와 굴종(屈從)의 둑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남자의 성기를 원망(怨望)한다는 감정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그러한 소망이 무의식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성적인 공격을 받을거라는 환상과 착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 여인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지적으로 뛰어났으며 끝내 병식(病識)을 거부했다. 도대체가 자신의 알지 못할 심부에 그러한 불결하고 추잡스런 욕망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와 열 번째 약속한 날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편집광이 말끔히 치유되었는지 더 악화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무쪼록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비교컨대, 나도희가 그 귀부인과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제멋대로의 이런 여자는 천성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을 모른다. 억압이니 성기원망이니 하는 따위가 불만족한 상태로 생겨날 리가 없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나도희가--그녀의 유일한 장점은 대구 출신인데도 사투리 억양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호사 지망자들에게 야멸차게 대했던 것처럼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내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제2, 제3의 나도희를 만날 뿐이라는 현실에 설득당해 그냥 쓰기로 작정했다. 물론 듣기 싫어할 소리를 1시간 이상이나 따분하게 늘어놓은 후에 말이다. 2. 순결 안효숙(安孝淑)은 조신한 여자였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밑바닥에는 조심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사내의 거칠고 야만적인 손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퉁겨 줄 듯하면서도 그것이 분에 넘친 방어이거나 불순물이 섞여 든 흔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표정은 항상 부드럽고 너그러워 보였다. 그 이율배반적인 실루엣, 그 이중성이 내게는 신기하게만 여겨졌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미지는 모성애 바로 그것이었다. 옷의 평범한 단추 하나에까지 세심한 정성을 쏟는 듯한, 그래서 언제나 어머니의 다정스런 후원이 느껴지고, 그녀의 고즈넉한 목소리는 상대방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그녀가 나타나자 마자 주위의 공간과 사물이 안정을 찾는 듯한 소담스런 여자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세든 병원 건물의 옥상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 비둘기는 원하는 수준을 만족시키는 간호사가 쉽사리 채용되지 않아, 나는 여유를 두고 모든 것을 천천히 해나갈 참이었는데, 우연히 대구 시내에 구경을 나갔다가 조류를 파는 가게에 들러 사들인 공작비둘기 한쌍 중 암놈이었다. 공작비둘기는 그 이름 그대로 꼬리가 부챗살처럼 우아하게 퍼져 있고 몸전체가 백설기처럼 티없이 맑은 흰색이었다. 그것이 단박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었다. 사실 K대학 교정에서 보았던 잿빛의 비둘기 떼들은 낭종에서 파생한 변종으로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과 지중해까지 광범위하게 서식하고 있지만 순결을 상징하기엔 그 빛깔부터가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공작비둘기를 발견한 것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놈들은 내가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비좁은 쇠창살 사이로 미끈한 부리를 내밀고 조류 특유의 무표정한 눈길로 동정을 호소해 오는 것이 아닌가. 슬프게 우짖듯 비쩍 마른 몸통을 흔들어대는 그 불쌍한 짐승들을 대하자 나는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다. 이어 느닷없이 가게 주인이 1킬로그램도 채 안돼 보이는 생명체들을 매질하고 못살게 구는 변태성 학대자같이 느껴졌다. 결국 뜬금없이 불길 같은 충동에 휩싸여 앞뒤 재지 않고 공작비둘기를 사들인 셈이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홰를 칠 때면 드러나곤 하는 그 보드라운 순백의 깃털이 순결이라는 내 병원의 원훈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마스코트로 길러 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품에 안은 암놈에게 손바닥의 모이를 들이민 채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던 나는 병원 앞에서 간판을 올려보며 서성거리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는 날아갈 듯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어깨 위로 풍성한 흑발을 드리운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실려 온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영롱한 풀잎이슬에 씻긴 듯한 해맑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음에도, 아니 화장을 하지 않은 탓에 내 시선은 빨려 들 듯이 그녀의 움직임에 가 꽂혔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잠깐이어서 그녀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자 왠지 허전한 아쉬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조금 후 도희가 헐레벌떡 옥상으로 뛰어 올라와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전갈했다. "선생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누군데?" "간호사 자격증이 있다나 봐요." "그래? 광고를 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그 비둘기는 제가 새장에 넣어 드릴게요. 어서 내려가 보세요." 도희는 비둘기를 낚아챌 듯이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긴 초콜릿색 손톱이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연약한 비둘기의 살갗에 상처라도 낼 것 같은 두려움에 한 걸음 물러나며 거절했다. "아냐, 먼저 내려가 있으라구. 서두를 일도 아닌데 왜 이리 허둥대는 거야." 나의 핀잔에 도희는 총총걸음으로 옥상에서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돌아섰지만 추스른 어깨와 뾰족한 뒤통수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골이 났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새장으로 다가가 덧문을 열어젖혔다. 시큼한 새똥 냄새가 확 번져 왔다. 그늘진 안쪽에서 수놈이 푸드득대며 암놈을 반겼다. 그 몸살하는 거동이 까딱했으면 내게 배우자를 빼앗길 뻔해다는 듯이 목을 상대의 몸통에 부벼대며 부리로 입맞추며 애정을 과시하는 거였다. "젠장!" 나는 바닥에 보이기 시작한 물통을 갈아 줄까 하다가 놈의 헛장단에 질투심을 느끼며 문을 꽝 닫고 돌아섰다. 옥상을 나설 때까지 놀란 놈들이 활개짓을 하는 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려 왔다. 진료소에 들어서자 한 아가씨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꾸벅 인사를 해왔는데-- 아아, 나는 왜 이다지도 감정의 굴곡이 심한 것일까! 그 아가씨가 바로 하늘색 원피스의 주인공임을 깨닫자 나는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안절부절 못했다. 내 방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소파의 자리를 권하고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의기양양한 17살 소년처럼 들뜰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간호사를 채용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어요." 그 말에 나는 가까스로 흥분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왔지?" "U병원에서 추천을 하더군요." 그 병원은 대학 선배가 몸담고 있는 곳이었다.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나?" 그녀의 얼굴은 싱그럽긴 했지만 25살은 넘어 보여서 하는 말이었다. "네, 내과에서 3~4년 근무한 경력이 있어요." "개인병원이었어?" "아니에요. 대학병원이었어요. 서울 중앙극장이 있는......" "아니 뭐 좋아." 나는 재빨리 말허리를 자르며 덧붙였다. "정신병원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정신병원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간호사를 원하고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 쪽 방면에 관심과 애정이 있기를 바랐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더 물어 볼 것이 없었다. 여태껏 들뜬 기분으로 찾아왔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간 간호사들도 다 그 때문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내 마음은 왠지 그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여자에게만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내 곁에 두고 싶은 생각에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겠군?" "하지만......열심히 해 볼게요." 초조한 기색을 머금은 그녀의 눈빛은 결연한 투지로 빛났다. 매달려 애원을 해서라도 취직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야 좋지만 난 솔직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현실과 충동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커피 두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나타난 도희가 주제넘게 참견하고 나섰다. "우리 선생님은 최소한 융쯤은 알고 있는 간호사를 원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포기하시는 게 나을 거예요." 도대체가 도희란 처녀의 속마음의 구조는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따위로 무례한가. 그 순간 나는 눈을 흘겨 도희를 쫓아 보내면서 결국 현실을 택하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융을 모른다면 기꺼이 돌려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융이라면 심리학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녀가 눈치 빠르게 물어 왔다. "그래."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에요. 이를테면 '우주인과 비행접시'는 미국인의 공상과학적 성향에서 나온 것으로 집단 무의식적인 착각이나 환상일 거라는 거죠. 아마 그 책 제목이 '현대의 신화'이던가요?"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이든 어쨌든 융을 읽은 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근질근질해진 난 입을 열었다. "그 외에는?" "4라는 숫자는 일종의 원형으로서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열어 보이는 매개자라는 게 생각나는군요. 동그라미나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는데 그 본체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4로 분열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덧붙여 그건 형이상학이 아니라 심리학적 공식이라구요. 헌데 선생님은 그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신가보죠? 융에 대한 지식이 간호사의 채용 기준이 될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 융의 저서를 읽은 지도 꽤 오래 된걸. 다만 지난번에 찾아왔던 몇몇 간호사가 융의 이름조차 모르기에 그 후로 시험삼아 들먹인 것뿐이야. 다시 말하지만 나도 융에 대해 희박한 건 아냐. 도희가 괜한 소리를 해 가지구서......" "차를 날라 왔던 아가씨 말인가요?" "그래, 경리를 맡고 있는 아가씨야." 우리는 잠시 말없이 커피를 스푼으로 휘저었다. 나는 그동안 페터 비르크호이저의 그림에서 자주 인용되는 4개의 눈을 가진 기괴한 인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달밤에 네 팔을 가진 소년이 말을 타고 가는 장면도 생각났다. 그것이 융이 강조한 바 자기(Self)이며 기독교의 그리스도요, 노자의 도(道)인 동시에 인도의 아트만인 것이다. 우리 정신이 내적 중심이면서 꿈에서는 흔히 초월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우주적 인간상은 인간 존재의 목적이 먹고, 마시고 권력을 추구하고, 섹스를 즐기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운명지어진 생활이 가져다 준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길--그것이 심리상의 결함이든 경제적인 빈곤이든 유전상의 우둔이든 간에 스스로 말미암은 자유나 삶의 설계는커녕 언제나 현실의 질곡에 발목이 붙잡혀 허덕이고 몸부림치다가 육체와 정신 모두가 곪고 상해 버린 수많은 인간을 보아 왔다. 그들의 고민은 현세의 초월이나 고매한 도덕적 지평선에 대한 흠모에서 오는 열등감 따위가 햄 한 조각, 밥 한 숟가락, 사탕 한 톨, 단 1분 간의 피부접촉이 부족해서 생겨난 지병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나를 유쾌하게 했다. 그녀가 지적으로 나를 자극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그러자 일단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 나의 마음은 그녀의 용모와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사투리를 안 쓰는데 이곳 출신이 아닌가 보지?" 나는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네, 실은 여동생 학업 때문에 여기 내려온 거예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겠어?" "집은 원래 서울인데 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못돼서요." "아, 그래, 그럼 거처는?" "이 근처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 세들었어요. 동생이 K대학에 다니거든요." "바로 요 앞에 있는 대학 말인가?" "그래요." 알 수 없게도 그 대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K대학의 교정이 그녀와 내가 오랫동안 같이 뛰어놀며 천진난만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공동 기억의 터전이라도 되는 양,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친근한 말투로 부드럽게 대하자 그녀도 굳었던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더불어 그녀의 표정엔 채용이 될 거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바로 '결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알고 싶었으며 당장은 옷맵시와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데 정신없이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도희와는 정반대의 여자였다. 도희가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아가씨라면 그녀는 지극히 온건하고 평온해 보였으며 상대를 압도하는 기품마저 엿보였다. 나는 그러한 기품이 유난히 하얗고 맑은 살갗과 사지가 기다란 골격--큰 키가 아니데도 수족이 길어 몹시 커 보였다--때문이라는 것은 알았다. 흔히 고귀한 영혼이 깃드는 체형이란 세장형(細長型)이라고 말하여지는데, 그녀는 그 체형의 전형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서 때로 느껴지는 경박성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이 아름다움과 총명을 겸전한 처녀라고 느끼면서 나는 그레언 그린의 소설 '사랑의 종말'을 떠올렸다. 주인공 밴드릭스가 사라에게서 자각했던 것이 바로 그런 감정인데, 그린은 심리학자의 표현을 빌려 사내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에게서 느끼는 열등감을 코페처 콤플렉스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거기다가 어머니나 누나의 이미지를 덧보태고 싶었다. 안효숙이 가진 아름다움은 순결한 것이었으며 어떤 성적인 요소도 배제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배우였다면 '엠마뉴엘'의 실비아 크리스텔이나 겨우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창녀역을 완벽히 소화해 낸 조지 포스터, 어린 소녀의 배역 못지 않게 요부의 끼를 연기할 수 있다는 강수연의 섹시한 표정을 짓지는 못했으리라. 그녀는 오히려 테스 같은 여자였다. 순결한 여인의 상징--더어비 필드가의 아침 안개 같은 소녀 테스! 나는 문득 그녀가 그 책을 읽었는지 궁금해졌다. "토마스 하디를 좋아해?" "네?" 그녀는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순간적으로 멀뚱히 쳐다보다가 금세 태도를 바꿔 말해 왔다. "테스의 저자를 말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 책을 읽었군." 나의 가슴 밑바닥에서 기쁨이 솟구쳤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읽은 것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 그녀가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니까 나는 턱없이 우쭐해졌다. 이 천박한 지식 과시욕, 그건 떨칠 수 없는 내 성격의 결함이다. "테스를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다뇨?" "아무거나,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너무 막연하군요. 줄거리도 지금에 와서는 떠오르지 않구......" 왜 그런지 나는 그녀가 순결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의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으면서도, 나는 성급하게도 상대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게 되면 멍청해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내 선의의 의사를 왜곡하는 독선적인 인간으로 보아 버리기가 일쑤였다. 이럴 때면 나는 당초에 신중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싶었던 것마저 뒤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참을 수가 없었다. "테슨 바람기가 있는 여자가 아닐까?" "바람기요?" "그 여잔 좀더 신중해야 했어." 나는 내뱉고 싶은 대로 주절거리며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그녀는 영문을 몰라 움츠러든 태도였다. "테스는 왜 알렉이 마차 위에서 입술을 훔쳤을 때 바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아, 네......" 그녀는 그제서야 내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당황한 나머지 쩔쩔맸다. "테슨 알렉의 성욕을 간파했어야 해. 그리고 바로 체이스 숲 속에서 떠나갔어야 해!" 나는 까닭없이 흥분해서 강변하듯 소리쳤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테스는 불가항력이었어요. 테스가 마차를 타고 가던 그 길은 온통 수송나무와 참나무로 뒤덮인 심산유곡이었다구요. 더군다나 시야를 가리는 안개마저 끼어 있었구요. 그 상황이라면 어떤 여자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테슨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아냐, 그렇지가 않아. 테슨 남자의 본능적 욕구에 대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에 당하고 만 거야." "전 선생님의 그런 해석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테스의 이미지는 순결 그 자체잖아요. 또 남자의 본성에 대해 그녀가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도 전 이렇게 보고 싶어요. 테슨 남자에 무지했기에 곱고 순결할 수가 있었던 거라구요." 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를 궁지에 몰아세울 수 있다는 것에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논쟁에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언어의 유희에서조차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의대 시절 길들여진 버릇이었다. "좋아. 그럼 얘기를 돌려 보자구. 조해일의 '겨울여자'를 읽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이화는 어땠지? 이화는 석기에게 고스란히 당하면서도 정신적인 순결을 부르짖고 있는 위선자로 나오지. 도대체가 육체가 더럽혀졌으면서도 정신이 깨끗할 수 있다고 믿는 심신이원론자들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어! 테스도 그 점에서만 자신에게 솔직했어야 해." "그녀는 욕을 본 괴로움으로 인해 자아가 산산조각이 났는데두요?" "테스나 이화나 다들 창녀의 더러운 피를 타고난 자들이야. 그런 비속한 인물들에게 동정심을 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도덕심마저 의심해 봐야 해." "저로서는..... 선생님은 대체 여자에게 뭘 바라는 건가요?" "그야 물론 완벽한 순결이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그렇게 내뱉고 나서 나는 너무 심하게 말한 것이 아닐까 반성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표정에는 근심의 빛이 어려 있었으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첫 대면에서 소모적인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필요까지 있었을까 자책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 왔다. "그래서 대기실의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 담긴 휘호가 순결이었군요?"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일어섰다. "그만한 관찰력과 센스라면 아가씨를 채용하겠어." 3. 연정(戀情) 처음 얼마간 대구에서의 진료 생활은 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환자다운 환자를 원하고 있었다. 내 이러한 생각이 의사로서의 의무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위배되는 것이겠지만, 진정 정신적인 손상을 입고 심리가 일그러진 환자--순전히 피동적으로 본건적이고 가부장적인 낡은 권위를 억지로 참고 참아 내다 육체병에 걸린 늙은이들이 아니라 젊고 발랄하면서도 실은 깊은 내면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30대 미만의 세대--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헌데 기대에 어긋나게도 기껏해야 내과에서 원인을 찾지 못한 가슴앓이로 인해 우울증이 걸린 할머니, 맏딸이 가출을 한 이후로 머리가 바늘로 쑤시듯이 아프다는 피골이 상접한 아주머니,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에는 도무지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은퇴병에 시달리는 어느 대기업의 간부, 화초에 물을 주다 2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뇌에 손상이 온 어린이 같은 부류가 한동안 나의 고객들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치료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하품이 날 것 같은 권태로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들에게는 그저 적절한 조언과 함께 강력한 마취의 효과가 있는 페노티아진(Phenothiazine)이나 클로르프로마진(Chlopromazine) 계열의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조제해 주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내가 고민한 문제는 10분 가량의 면담에도 3천 원 이상을 받는(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환자의 경우) 진료비마저 돈벌이가 가난한 환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변명하는 게 아니라 나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력이 있는 간호사와 수납계 여직원에게 주는 월급과 건물임대료 그리고 앞산 쪽에 전망 좋은 별장을 사들인 것만으로도 수입이 빠듯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환자들에게서 아무런 활력이나 자극도 받을 수 없자 내 관심은 두 여자에게로 쏠려 갔다. 아니, 내 유일한 관심은 효숙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내 마음속에서 한 여자를 유혹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자--어쩌면 있지도 않은 욕구를 느끼는 체했는지도 모르겠다--그녀의 주위에 부침하는 도희에게도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내 처지가 몹시 불쾌했으나 조그만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은 지난밤의 과음(나는 외로움을 잘 탔으므로 고약한 술버릇이 있었다)으로 평소보다 30분쯤 늦게 진료실로 들어서던 중 언성을 높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야단이야?" 따지듯 말하는 도희의 앙칼진 목소리였다. "아직도 내가 말하는 뜻을 모르겠어? 너를 꾸짖자는 게 아니잖니. 싱싱한 백합을 함부로 내버린 건 낭비야. 그 꽃은 사온 지 겨우 3일밖에 안됐다구. 그리고 그것도 그래. 화병도 꽃도 다 내가 사 온 물건 아니니. 그렇담 적어도 그걸 처분할 때 내 의사를 한번쯤 물어 보는 게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어?" "화병 하나 사온 걸 갖고 시시콜콜 유세 떠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못 써." "그게 그거지 뭘 그래?" "넌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못된 아이로구나." "그래도 언니의 그 위선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난 언니가 왜 흰 백합을 사 왔는지 다 알아.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는 거지? 백합처럼 언니가 순진무구하다는 인상을 주려는 거 아냐? 치사해! 내가 백합의 꽃말이 순결이라는 걸 모를 줄 알아?" "어, 어쩜...... 넌......" "왜 찔리나 보지?" 나는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문간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더 두었다가는 둘이 머리끄댕이라고 휘어잡고 나뒹굴 것 같은 기세에 그리고 약간은 효숙이 당황해하는 표정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으로 걸음을 떼었다. "아침부터 왜 이리 시끄럽지?" 나는 그들 뒤로 다가서며 짐짓 눙쳤다. 나를 먼저 알아본 도희는 손에 쥐고 있던 사과꽃(그것이 사과꽃인지는 나중에 알았다)을 앞세우며 쫓아와서는, "선생님 이 꽃 어때요? 예쁘죠?" 하고 빙긋 미소 짓는 것이었다. "으응, 예쁘군."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하며 도희의 어깨 너머로 효숙을 건너다 보았다. 그녀는 외면한 채 시선을 창 밖에 던지고 있었다. 그녀의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이 볼을 반쯤 가려(나는 그녀가 간호사 모자를 못 쓰게 했다), 이런 유쾌할 것 없는 상황이 그녀의 감정에 불러 일으켰을 미세한 파문마저 감싸 주는 것이었다. "이 꽃 선생님 방에 갖다 놔도 되죠?" 도희는 아빠에게 졸라대는 귀여운 딸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나를 설득시켜 자신의 편에 끌어들임으로써 방금 전 있었던 효숙과의 입씨름에서 입었던 자존심의 상처를 일시에 회복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녀의 아양기 섞인 요구에 대한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효숙의 기분도 리트머스 종이처럼 달라질 것이 뻔했지만, 나는 그 순간만은 도희의 발랄한 애교에 이끌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과꽃은 임시변통의 주발에 담겨 내 책상 위를 화사하게 가꿔 주는 장식물이 되었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효숙이 마련했던 오끼나와 원산의 나팔백합과 하얀 바탕에 붉은 반점이 박힌 오판화(五板花)인 사과꽃 사이에 특별한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헌데 이날 내내 순결이라는 백합의 꽃말과 도희의 빈정거림처럼 효숙이 흰 백합을 선택한 것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가슴 떨리는 흥분에 사로잡혀 나는 아무것에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왠지 큰 실수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마치 옛애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난 후 아쉬운 미련에 뒷덜미를 줴잡힌 것처럼 허전하고 막막하기조차 했다. 이런 불안한 감정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하루 종일 시무룩한 효숙의 안색이었다. 그녀는 내가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나무라기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싸늘해진 태도였다. 환자와 상담할 때 의레 친절하게 내 방으로 안내해 와 살포시 웃어 주는 미소마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짓은 사무적이고 딱딱했으며 매사를 억지로 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기라도 하듯 우연히 시선이 마주칠 때면 힐끗 바라보다가도 다음 순간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냉랭하게 눈길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나는 초조해진 마음을 쉽사리 달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개인적으로 만나 오늘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아아, 나는 왜 사소한 일에조차 주눅이 들어 버린 것일까?)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이라도 해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퇴근 무렵이 되자 용서받고 싶은 충동은 한층 나를 휘몰아쳤다. 이런 몹쓸 기분은 한 번 반찬 투정을 잘못했다가 몇 날 며칠을 굶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의 지주처럼 믿어 왔던 모성(母性)을 잃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엉엉 울고 싶은 어린아이의 심정과도 같았다. 나는 효숙이 퇴근을 하겠다고 내 방에 인사차 들렀을 때 마침내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오늘 온종일 우울한 것 같아?" "아니에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자, 잠깐, 같이 나가자구." 나는 얼른 가운을 벗어 던진 어깨 위에 웃저고리를 걸치면서 돌아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라도 들면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져 볼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환자 대기실에서 서가의 여성잡지를 정리하고 있던 도희가, "선생님, 퇴근하시려구요? 그럼 저랑 함께 나가요!" 하고 밉살맞게 끼어드는 바람에 일은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거리로 나오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도희만을 살짝 떼놓는다는 것에 가벼운 죄책감이 느껴지자 사실 전혀 내키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저녁을 사고 싶은데 바쁜 일들 없나?" 하는 말을 입 밖에 내었던 것이다. 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소리 안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구요." 하고 풀쩍 뛴 반면 효숙은 귀가하는 학생들로 부산해진 K대의 후문 쪽을 먼산바라기 같은 눈으로 응시하다가, "전 그냥 갈게요." 하고 맥없이 대꾸해 왔다. "왜 그래? 바빠?" 그 말에 나도 덩달아 의욕을 잃으며 말했다. "동생이 오기 전에 밥 지어야 해요." 그녀는 자식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 같은 말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주춤 물러나며 인사를 한 다음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마터면 돌아서는 그녀의 팔목을 나꿔채 품으로 끌어당겨 안을 뻔하였다. 촌각을 다퉈 자신의 일과를 윤택하게 하기에 바쁜 요즘 세태와는 달리 이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애정 어린 마음씨에 깊이 감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팔짱을 끼어 와 가기를 재촉하는 도희의 요구에 이끌려 그녀가 사거리를 돌아 사라지는 것도 못 본 채 시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채근하며 잡아끄는 대로 고급 레스토랑으로 따라 들어간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데다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소고기 요리가 날라져 오자 한동안 먹는 데 열중했다. "선생님은 왜 결혼 안하세요?" 침묵이 지루했는지 이윽고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 질문은 수도 없이 받아서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걸. 마음에도 없는 따분한 대화는 질색이야." "어머, 왜요? 총각 처녀는 원래 누구나가 결혼에 흥미가 많다던데요." "그것도 30대 초반까지의 얘기야.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엔 결혼도 더 이상 꿈이나 낭만일 수는 없는 거야. 단지 기회가 주어지면 박차고 나가야 할 현실일 뿐이지. 따라서 흥미로울 게 있을 리 없지." "너무 비판적으로 들리는데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그게 인생인걸. 그보다도 참! 효숙이와는 별로 사이가 안 좋은가 보지?"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요." 도희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헌데 아침엔 왜 다투었지?" "들으셨나 보군요?" "계단을 올라오는데 다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말이야." "별거 아니에요. 제가 시든 백합을 내버렸는데 언닌 그 꽃이 아직 싱싱하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그래서 오해가 있었던 거예요. 아까 점심 시간에 제가 사과를 했으니까 내일은 아마 언니의 표정도 밝아질 거예요." "효숙이가 백합을 산 게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말도 하는 것 같던데, 그건 무슨 뜻이지?" "어머, 그 얘기도 들으셨군요?" 그녀는 당혹스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그, 그건...... 절 나무라지 마세요. 전 다만...... 솔직해지고 싶었어요. 제가 느낀 것을 꾸밈없이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도희는 왜 효숙이가 내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고 믿는 거지? 효숙이가 내게 보이는 친절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세요! 그럼...... 선생님은 제가 괜한 질투라도 느꼈단 말인가요?" 나는 속으로 도희의 본능적인 느낌이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이제 도희의 질투심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효숙의 내심을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대화에 좀더 조심스러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얘기가 아냐. 가끔 도흰 민감한 도가 지나쳐서 하는 말이야. 이런 상상을 해 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을 누군가가 목격하고 마치 우리가 사랑에라도 빠진 양 다른 사람들에게 나불댔다고 생각해 봐. 도흰 얼마나 불쾌하겠어?" "......"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뭔가 신중하게 억누른 듯한 긴장이 얼굴의 표면에 스치는 듯하다가 별똥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이 풋내기 아가씨가 진짜 내게 엉뚱한 흑심을 품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까짓 게 무슨 대수랴. 스물 안팎의 철부지 시절엔 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사랑하려 들지 않는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려 했던 것인데 나는 다음날부터 효숙을 대할 때마다 도희의 시선이 신경이 쓰여 무엇 하나 대담하게 해 나갈 수가 없었다. 가령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효숙이만을 점심 시간에 데리고 나가면서 '도흰 우리가 다녀온 다음에 식사해도 되겠지?'하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젠 그런 부탁은 엄두도 못 냈을 뿐만 아니라 잔심부름 하나 시키는 것까지 그녀만을 부려먹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배려를 해야 했다. 헌데 따지고 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긴장은 내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효숙이에게 조금씩 싹터오르기 시작한 연정이 제3자에게 들킬까 봐 조바심을 내었던 것이다. 불치병의 인자(因子)처럼 그것은 길을 걷거나 혼자 멀거니 조용한 방심에 빠져 있을 때 불쑥불쑥 통증을 일으키듯 나의 불안을 자극했다. 나는 직장 내의 예비 커플이 자칫하면 악성루머와 질시 섞인 오해에 휘말려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파국으로 치닫는 걸 많이 보아 온 터여서, 개인적인 감정이 일을 처리하는데 개입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다. 그러자 멍울 서고 답답해진 건 내 가슴 뿐이었다. 효숙은 무딘건지 아니면 알고도 새침을 떠는 건지 내가 이따금 평소와는 다른 암시를 주어도 전혀 무반응이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맡은 일에 성실했으며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 곽웅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수학의 변형 X, Y, Z처럼 그 대입값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는, 따라서 언제라도 나 아닌 다른 인물로 치환이 가능한 메마른 웃음이었다. 결국 꽃 문제로 효숙과 도희간에 빚어졌던 갈등의 종장(終章)은 내 신경만 예민해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고백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격정에 넘친 젊은이처럼 앞뒤 없이 서두르는 것은 내 나이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사랑엔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건널 수 없는 급류를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드는 것 같은, 그러나 저쪽에선 이쪽의 의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아아, 그녀가 살짝 눈길이라도 한 번만 준다면! 다행히 이번 경우는 운이 좋은 것 같았다. 열흘 가까이 안정을 찾지 못하던 터에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하루 종일 뒤숭숭하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퇴근을 하자 혼자 K대의 교정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바람에 쓸려 온 낙엽이 발길에 채이는 노천강당을 두어 시간 배회하다가 효숙이와 마주친 것이었다. "아니,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박명(薄明) 속에서 먼저 알아본 건 그녀였다. "나야 가끔 이리로 머리를 식히러 오는걸, 헌데 효숙이는?" "동생을 찾으로 왔어요." "왜, 무슨 일이 있나?"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요즘 자꾸 늦게 들어와서요." "어린애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과보호를 할 필요가 있을까?" "집에서 간섭할 어른이 없다 보니 버릇이 없어져서 그래요. 제 말은 통 안 듣구요. 오늘만 해도 6시까지 꼭 들어오기로 어제 약속했었는데......" "그래? 그럼 어서 가 봐야겠군." 나는 비켜섰다. "아니에요. 도서관이랑 학과 사무실에는 벌써 들러 봤는데 친구들도 어딜 갔는지 모른대요." "그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찾아나선 거야?" "어쩔 수 없잖아요. 요샌 심야 범죄가 많아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더 조바심만 나요." "마음 고생이 많군. 바쁘지 않으면 저기 좀 앉았다 갈까?" 나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직장에서 부르는 간호사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효숙이 의식되어 긴장감이 살아났다. 우리는 무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천강당의 제일 뒷줄에 앉았다. 신선한 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스쳐갔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교감할 수 있는 것 같은 친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가운데쯤 앉아 있던 네 명의 여학생들이 짙어 가는 어둠을 의식한 채 제잘대며 일어나 자신들의 갈길로 가 버리자 나는 별안간 낯선 곳에 던져진 듯한 불안을 느꼈다. 이렇게 여자와 단 둘이서 있을 때면 나는 내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내가 만일 이 여자의 손을 잡고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노래하고 깊은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사랑을 고백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선생님은 왜 결혼을 안하셨어요?" 효숙이 불쑥 물어 왔다. 여잔 왜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일까. "글쎄, 왜 결혼을 안했을까?" "남 얘기하듯 말하시네요." "난 이따금 나를 잘 모르겠어. 효숙이도 그럴 때가 있을걸?" "물론 그래요. 인간은 누구나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 보니까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자기도취한 생존의 원동력이기도 하지. 누구나가 도취할 게 없다면 살아갈 매력을 잃고 마는 거니까." "그럼 선생님은 뭣에 도취해 살아가시는가요?" "효숙이에겐 어떻게 비쳤지?" "일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좀 약해. 내가 만일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면 전문의에 만족하지 않았을 거야." "궁금한데요. 선생님을 이토록 강렬하게 사로잡는 게 뭘까요." "아직은 딱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걸 생각할 때면 내 머리 속은 흥분으로 터져 버릴 것 같아. 그것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엘랑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이지. 내 정신은 나를 활활 불태울 수 있는 용광로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는데요." "보들레르의 이런 시구를 들어 봤나?" "어떤?" "사랑하면서 죽자!" "......." "얼마나 멋진 시구야!" "......" "지속되는 건 모두 권태로워. 우린 순간을 사랑해야 해. 늙은이가 된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해 봐. 그보다 더 끔찍한 상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야. 남편과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지쳐 버린 줄리엣! 오오 가엾어라. 그녀의 쭈글쭈글해진 목의 피부! 정말 목불인견일 거야!" 나는 효숙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말했다. "내가 혼자서만 떠들어댔군!"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전 선생님의 그런 진지한 모습이 좋아요.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구요." "난 낭만적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머 그건 또 왜요?" "낭만적이란 건 항상 거리감이 있는 개념이니까. 이를테면 손에 닿지 않는 밤하늘의 별, 놓친 기차, 백 미터 미인 같은 거지. 그건 가까이 하자마자 진실이 드러나 실망을 수반하게 되고 말지." "하지만 꿈을 꿀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잖아요. 언젠가는 저 별로 날아갈 거라는 꿈, 내일 다시 기차가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갈 거라는 희망 말이에요." "나는 동화 같은 얘기가 싫어. 그건 아이들의 사유야.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래서 젖비린내가 나는 듯한......" "현실적인 건 좋지만 전 삭막한 건 싫어요." "효숙인 모성애가 느껴지고 누구에게서라도 따뜻한 정을 나누어 줄 듯한 성숙한 여자가 아니었나?" "절 그렇게 보셨다니 뜻밖인데요. 전 전혀 그렇지가 못해요.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것두 싫구요." "화장을 짙게 하면 더 젊어 보일텐데 왜 안하는 거지?" "그건 비밀이에요." "비밀?" "말 못해요." 그 말이 내 궁금증을 한층 촉발시켰다. "그러니까 더 알고 싶은걸." "선생님에게 꾸중 들을까 봐 입에 못 담겠어요." "꾸중을 하다니! 절대 그런 일일랑은 없을 테니 얘기해 봐." "그럼 약속요." 머뭇거리며 주저하던 효숙은 마침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내가 거기에 손가락을 걸어 흔들고 나자 그녀가 얘기했다. "실은 정보가 있었어요." "정보?" "U병원에 취직자리 알선을 부탁하러 갔다가 거기서 로이드 정신병원으로 가 보라는 말을 들었는데, 한 간호사가 이런 귀띔을 해 주더군요. 선생님은 화장하는 걸 아주 질색으로 여긴다구요." "그, 그럼 일부러 화장을 하지 않은 거란 말인가?" 나는 혀가 꼬부라졌다. "화나셨나요?" "아냐, 더 얘기해 봐. 나무라지 않겠다니까." "그뿐이에요." "헌데 왜 취직이 된 후에도 계속 화장을 하지 않았지?" "선생님이 싫어하시니까요." 나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줏대 없이 남의 생각에 따라다니지?" "제겐 취직자리가 아주 다급했어요. 여동생 때문에 대구에 내려 와 있는 처지지만 집안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거든요. 어떡하든지 서둘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에게 밉보여서 행여 쫓겨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거죠." "내가 그 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텐데. 도희를 봐도 모르겠어?" "어쨌든 선생님은 화장한 여자를 싫어하잖아요."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어 속았다는 분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곳의 노천강당이 어머니의 자궁 같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까 앉아 있던 여학생들이 떠나가자 생겨났던 불안은 돌이켜보건대 효숙이가 전혀 모성애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사실 그녀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탓이라고 여겨졌다. 솔직히 이런 가벼운 속임수에 대해 겉으로 화를 드러낼 나는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지적인 간호사였고 효숙은 그런 수준을 웃돌게 만족시키고 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헌데 이 시점에서 나를 괴롭힌 것은 그녀에 대한 내가 가졌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모종의 고백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한순간 그런 느낌이 얼마나 자기본위적이고 무절제한 충동에 사로잡힌 것인가를 깨닫고, 나아가 그녀의 본성은 나의 자아적인 판단에 의해 끔찍하게 왜곡되어 나타난 아름다움에 불과했다는 것, 아침 안개 같은 소녀의 실루엣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 나는 농락을 당했으며 바보 행세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녀가 물어 왔다. "역시 화나셨나 보군요." "아냐,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불쾌하셨다면 사과 드릴게요."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일어나자구." 그때였다. 소나무숲 안쪽에서 두 명의 청년이 다가왔다. 그들은 팔에 흰 완장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학생이십니까?" 손전등을 든 청년이 말했다. "아닌데요." 내가 대답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댁들은 누굽니까?" "우린 규찰대입니다. 요즘 구내에서 불미스런 폭행사건이 많아 학생회에서 자체 순찰을 돌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주민등록증을 내보이자 청년은 손전등으로 비춰 보더니 말했다. "학교엔 무슨 볼일로 들어오신 겁니까?" "동생을 만나러 온 거예요." 효숙이가 적절하게 나서 주었다. "아, 네." 청년은 내가 여자를 동반하고 있어서인지 별다른 의심 없이 밤늦게까지 남아 있지 말라는 주의를 준 후 학생식당이 있는 방향으로 동료와 함께 멀어져 갔다. 나는 노천강당을 빠져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효숙도 나란히 걸었지만 몹시 불안한 것 같았다. 정문 앞 광장에 이르자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전 한 번 더 동생을 찾아봐야겠어요. 이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학교에 남아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래두요." 그녀의 눈빛이 간절해 보였다.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으므로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녀를 혼자 방치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행동일 것 같아 타협안을 제시했다. "난 아직 식전이거든. 저녁밥을 먹고 같이 찾아보는 게 어떨까?" 효숙이로서도 어두운 밤에 혼자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선뜻 승낙했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저녁을 먹겠다며 식사는 굳이 사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오뎅꼬치 몇 개로 간단히 요기만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동안 시간이 꽤 흘러 9시가 넘고 있었다.공부를 끝낸 대부분의 학생들이 도서관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열람실을 일일이 돌아보고 나서 도서관에 그녀의 여동생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제 어쩌죠?" "집에 연학을 해 봐. 그 사이에 들어왔는지도 모르잖아." 효숙은 그 생각을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으나 금방 시무룩해져서 돌아왔다. "받질 않아요. 아직 안 들어온 게 틀림없어요." "학교 구석구석을 한번 뒤져 보지." 나는 그녀의 안색이 핼쓱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우리는 먼저 눈에 띄는 장소부터 차근히 점검해 나갔다. 게시판이 있는 가정대 앞, 운동장 아래쪽에 붙은 전문대 휴게실, 학생회관, ROTC생도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소운동장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건물 뒤의 벤치 등등...... 그러다가 발길이 다다른 곳은 음악관 뒤의 무성히 우거진 숲이었다. 키가 큼직한 교목이 주종을 이룬 숲은 음산한 분위기마저 띠우고 있어 선뜻 접근해 들어가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복잡한 가지를 헤쳐나가 상당히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우리를 자극한 것은 귀에 거슬리는 신음 소리였다. 그것은 남녀가 한테 엉겨 페팅에 열을 올리는 소리였는데, 한 군데서만 나는 게 아니라 몇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효숙은 그 '청춘의 메아리'를 들으며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몹시 불쾌했다. 내가 효숙에게 물었다. "동생 이름이 뭐지?" "효진이에요." 나는 나무그늘을 기웃거리며 그 이름을 불러댔다. "효진아! 효진아!" 그러자 더 이상 신음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두어 커플은 옷자락의 검불을 털며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사라지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팔!" "뭐 저 따위들이 있어!" 우리는 그에 개의치 않고 어둠에 잠긴 숲 속을 무작정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가 길이 막혀 더 들어갈 수 없을 때야 되돌아나와 숲의 입구에 멎어 섰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그럼 학교 밖 어디 디스코텍이라도 간 게죠." 그녀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쪽 벤치에 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우리도 돌아가지." 내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효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 숲 속에서 들은 소리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흥분한 건지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언니였어!" "아니, 너......" 효숙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너 이렇게 말 안 들을 테야! 대체 여태까지 어디서 뭘 한 거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해온 쪽을 살펴보자 효진의 어깨 뒤에서 청년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방을 든 차림새로 보아 같은 대학생인 듯했다. 효숙은 어리둥절해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효진은 재빨리 청년의 팔목을 나꿔채 달아나며 소리쳤다. "언니, 걱정하지 마! 다방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들어갈게. 12시 안에는 꼭 들어갈 거야." 효숙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동생이 달아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안정을 되찾는가 싶어 서둘러 그곳을 떠나려 했을 때 효숙은 벤치에서 털썩 주저앉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봐 효숙이,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나는 그녀 옆에 앉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품에 와락 안겨 들며 목놓아 울었다. 부득불 우리는 한동안 서로 껴앉는 자세가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숨결과 향긋한 머리내음에 몸을 내맡긴 채 효숙이가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동생이 이런 밤에 남학생과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소슬한 바람과 적막이 부드럽게 벤치를 감쌌다. 나는 뱀이 바위 위를 기어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민감해져 있었다. 그녀의 사소한 움직임, 숨소리, 속삭임 같은 바람결에 내 얼굴로 흩어지는 머리카락 그리고 여인의 체취. 나는 황홀했지만 곧 감정을 억제해 일어서려 했는데 효숙이 만류했다. "선생님 움직이지 말아요. 이대로 있고 싶어요." "늦었는데." "품이 따뜻해요." 그러며 효숙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이런 데 익숙하지 못했다. 케빈 코스트너가 나오는 영화의 장면처럼 넓은 가슴으로 품어 주고 위로의 말을 건넬 만큼 세련되지 못한 사내였다. 그러다가 우린 뜨겁게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강렬한 요구의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나는 유혹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의 입술은 하나가 되어 서로의 욕구에 빨려들 듯 용해되어 갔다. 잠깐, 나는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해 가는 기분에 전율했다. 그것은 아주 강렬했으나 불쾌한 여운을 남기는 감정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내려감은 채 내 입술을 세차게 빨아대는 데 몰입해 있었다. 그녀의 혀는 내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와 유연한 움직임으로 구석구석을 핥았다. 혀와 혀는 뒤엉겨 한덩이가 되었다가도 금세 다시 떨어져 상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에 온 신경은 오직 혀끝에만, 혀가 가져다 주는 쾌감에만 집중된 것 같았다. 키스는 원래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갑자기 불결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품에서 밀쳐 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점잖지 못한 짓이야! 그만 돌아가자구!" 4. 비둘기의 죽음 며칠이 지났다. 시든 낙엽이 진료실의 창가를 스쳐 떨어질 때면 나는 문득문득 가을을 느꼈다. 커피향과 외로운 여자 그리고 편지가 생각나는 계절이었다. 일에서 벗어나 조용한 방심에 빠져 있을 때 이유없이 허전하게 비워져 가는 가슴에 애타했다. 나는 사랑해 줄 사람이 없었다. 효숙은 나를 사로잡을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달콤한 입술과 포근한 젖가슴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오금이 저리도록 강렬한 체험은 아니었다. 나는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했으나 결국에는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산사람의 기분이었다. 실족의 위험은 산사람에게는 무용담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은 일과에 불과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사내가 단 한 번의 키스로 인생을 고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 그러한 분위기에서는(나는 굳이 누구의 책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녀보다 음탕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우린 소용돌이 같은 순간의 틈바구니에서 음양의 조화 속으로 빨려 들었을 뿐인 것이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효숙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사랑을 믿어 버린 성급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녀에게 모성애를 투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냈을 은밀한 시선의 끈끈함을 그녀가 느끼지 못했더라면, 벤치에서의 입맞춤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데이트를 하자고 졸라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한 번의 입맞춤이 그토록 중요한 행위였을까? 아닌게 아니라 그 키스는 그녀의 건조하고 메마르던 생활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음전하고 매사에 조심스럽던 아가씨도 도희처럼 화장에 관심을 쏟고 남의 매정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하나의 몸짓--자신에게는 별게 아니지만 남에게는 쇼크가 될 수도 있을 제스처가 나를 괴롭혔다. 원죄라는 게 있다면, 여자의 경우, 그것은 나르시시스트의 체질일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김수영의 '여자'란 시를 떠올리곤 했다. 그 이마의 힘줄 그 힘줄의 集中度 이것은 罪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모성애를 갖지 않은 여자란 여자라 불리울 자격도 없는 것이다. 나에게 여자란 비린내가 연상되는 젖가슴일 뿐이었다. 그것은 대지(大地)와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생산으로 충만한 무엇이어야 했다. 인간이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어머니의 품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여자를 꿈꾸어 왔던 것인데, 효숙은 처음의 인상과는 달리 내 기대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그녀의 요구에 냉담했다. 그녀가 만나기를 원해 오면 치사스러운 방법이지만 도희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도희는 중간에서 효숙이 더 이상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파수꾼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해 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간다든가, 퇴근 무렵 내 옆자리를 지킴으로써 효숙의 접근을 교묘히 방해한다든가 했다. 도희는 나름대로 계산 속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효숙의 대리역은 못되더라도 효숙과 나의 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알량한 자존심을 보상받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회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효숙은 나의 일방적인 외면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따금 도희와 충돌을 빚고 있었다. 하루는 노골적으로 나를 빚대어 하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너 이래도 되는 거니?" "뭘 언니?" "계속 선생님 앞에서 알짱거릴 거냐구?" "무슨 소리야?" "그걸 내 입으로 말하란 말야?" "그래 말해 봐. 말 못할 게 뭐 있어?" "여기선 싫어. 너 이따 길건너 지하다방에서 좀 봐." 나는 그 후속 얘기를 듣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한 가지 나를 크게 자극한 것은 효숙의 표리부동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겉과 속이 다른 여자였다. 흔하게 비유해 수박 같은 여자였다. 겉은 신선한 초록빛이 돌지만 속을 빨간, 그래서 얼핏 보는 사람에게 푸르게 인식되고 마는. 나는 그녀가 왜 좀더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내게 우리 사이에 생겨난 미묘한 갈등을 따져 묻지는 않았다. 둘이서 다투는 소리를 들은 며칠 후 퇴근 무렵이었다. 나는 오전에 기록한 카르테를 점검한 뒤 캐비닛에 집어 넣고 있었는데 도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무슨 일인데?" "옥상에......" "옥상에 뭐?" "비, 비둘기가......" 나는 앞서는 도희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는데--아아, 인간의 본성이란 이다지도 잔인한 것이란 말인가! 두 마리의 공작비둘기는 목이 비틀린 채 죽어 있었다. 죽는 순간의 끔찍한 고통을 반영하듯 몸에서 뽑혀져 나온 깃털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부리는 바닥의 쇠창살 틈으로 처박히고 날개는 몸의 일부가 아닌 듯이 제멋대로 꺾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벌벌 떨고 서 있는 도희를 노려보았다. "제, 제가 안 그랬어요." "왜 이렇게 된 거야?" "모, 모르겠어요. 잠시 바람을 쐬러 올라왔다가 발견하게 된 거예요. 먹이는 항상 선생님이 주시잖아요." "효숙이는?" "10분 전에 볼일이 있다고 먼저 퇴근했어요." "내게 말도 않구?" 불기둥이 치솟는 듯한 분노를 일으키며 진료실로 돌아온 나는 효숙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을 기미가 없자 그 즉시 병원을 뛰쳐나와 아파트로 찾아갔다. 흥분한 탓에 효숙의 짓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파트에 없었다. 사는 동 앞에서 30분쯤 기다리자 그녀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내가 서둘러 그녀에게로 접근해 가자 효숙은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어머나, 선생님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다짜고짜 말하였다. "......"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눈만 말뚱말뚱했다. "비둘기를 어떻게 한 거야?" "비둘기라뇨?" "시침 뗄 거야?" "비둘기가 도대체 어떻게 됐길래 이러시는 거죠? 또 시치미는 뭐구요?" 나는 홧김에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목이 꺾어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들떠 숯불 같은 열기를 품고 있던 그녀의 눈빛은 곧 경멸이 담긴 적의의 빛으로 변해 갔다. 효숙은 무슨 말을 내뱉을 듯 입술을 움직거리다가 몸을 획 돌려 아파트 입구로 달음박질쳤다. 내 발 밑엔 그녀가 떨어뜨린 시장바구니 속에서 튀어나온 홍당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바구니에 주워담다가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치고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튿날부터 효숙이가 병원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내가 출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으로 쫓아와서는, "어제 제 따귀를 때리신 이유가 죽은 비둘기 때문이었다면 사과하세요. 전 비둘기를 안 죽였으니까요." 라고 따져드는 거였다. "정말 죽이지 않았나?" 나는 정색을 하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가 그 연약한 짐승을 왜 죽이겠어요? 어젠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오늘은 사과를 받고 말겠어요." 그녀는 단호해 보였다. "그럼 도희가 죽였단 말인가?" "전 그런 말 안했어요. 또 도희도 안 죽였다고 하구요." "웃기지도 않아.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아니면 공작비둘기는 왜 시체가 되어 새장에 처박혀 있는 거지?" "그걸 난들 어떻게 알겠어요. 이 건물을 드나드는 짓궂은 꼬마들이 장난을 쳤을 수도 있구,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그건 아이들이 한 짓이 아니야! 아이들은 절대 잔인하지 않아." "맘대로 생각하세요. 하지만 전 안죽였어요." "그래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사과를 하세요." "사과? 그거 조오치! 그래 사과해." 나는 빈정대듯 말했다. "선생님답지 않아요. 잘못을 시인하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지? 피해를 당한 건 나야. 화를 내도 내가 내야 한단 말야." "선생님에게 실망했어요." "피차일반이야." 효숙은 더 입씨름하기도 싫다는 듯 쌀쌀맞게 몸을 돌려 나갔다. 나는 혼란을 느꼈다. 효숙이가 아니라면 도희란 말인가? 하지만 도희는 내게 쫓아와서 비둘기의 죽음을 알린 장본인이 아닌가? 나는 며칠을 두고 이 문제를 고심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비둘기의 시체를 들고 수의사에게 찾아가 부검을 의뢰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정신적인 낭비란 생각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설혹 비둘기를 죽인 사람이 효숙이가 아니더라도 그녀와 냉담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빌미로 삼기 위해서 진실을 덮어 두고 싶은 속셈이 작용했다. 나는 한동안 긴장상태에 돌입해야 할 자신을 생각하자 신경질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두 아가씨는 나를 도와 주는 피고용인이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부담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흥미를 끄는 여환자가 나타난 것이다. 5. 불감증 환자 정은경 정은경(鄭銀鏡)은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빨간 레인코트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나 자신을 치료해 주기를 요구했다. 레인코트 안에 입은 슈트도 빨간색이라는 것은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개론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빨간색을 좋아하는 여자는 극단적이라는 선입견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이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불감증을 호소해 왔다. "선생님 전 왜 이럴까요?" "어떤 증상에 시달리는지 말씀해 보세요." "느낄 수가 없어요." "느낄 수가 없다뇨?" "오르가즘을 느낄 수가 없어요." 나는 당황했다. 정신과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이렇게까지 대담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무척이나 조용해 보여도 내심은 정렬적이며 도전적인 여자 같았다. "남편과 무슨 문제가 있는가 보죠?" "아녜요. 전 아직 미혼이에요." 이 대답은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28살쯤 된 성싶고 머리형은 길고 뾰족했으며 전체적으로 이지적인 인상이 강하게 풍겨났다. 발그레한 볼 밑의 하관은 갸름하면서도 빠르게 아래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결코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상담을 하는 내가 마주 바라보기가 계면쩍을 정도였다. "그럼 사귀는 남자가 있는가 보죠?" "네, 만난 지 6개월 남짓 됐어요." "성관계를 맺은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그녀가 워낙 거리낌없이 나오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물을 수가 있었다. "5개월쯤 됐어요." 사귄 지 한 달 만에? 과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먼저 요구했나요?" "서로가 원했어요." "혹시 은경 양은 내심 관계를 꺼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는......" "아니에요. 저도 관계를 원했어요." "좋습니다. 처음 관계를 맺은 장소가 어디였나요?" "여관이었어요." "평소 여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그냥 잠자는 곳, 쉬어가는 곳 뭐 그런 정도예요." "과거에 여관에 투숙했던 적이 있었나요?"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갔을 때와 친구들이랑 내설악에 놀러갔을 때 여관에 묵었던 적이 있어요." "남자와는요?" "그전엔 없었어요." "여관이 불결하다든가 정숙하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나요?" "여관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만은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갈 곳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관계를 원했다. 그리고 관계를 맺은 장소에 대한 불쾌감도 없었다--그렇다면 이 여자의 불감증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까닭을 종잡을 수가 없자 나는 아예 노골적인 물음을 던져 보았다.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가 첫 남자인가요?" "아녜요. 몇 남자와 사귄 적이 있었어요." "정도는?" "물론 개중에는 육체관계까지 맺은 남자들이 있어요." "은연중에 아직 과거의 어떤 남자를 못 잊어하는 것은 아닌가요?" "전혀요. 전 한 남자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나는 머쓱해지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연애의 상대방이 임포텐츠라든가?" "아녜요. 그이는 근육질의 사내예요. 언제나 정력이 넘쳐흐르는 편이죠."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잃고 난해한 수수께끼 앞에서 졸아든 꼴이었다.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보시죠?" 정은경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녀의 애인 인동하는 일종의 스포츠맨과 같은 사나이였다. 하루중에서 그가 규칙적으로 신경을 쓰는 게 있다면 운동 뿐이었다. 그는 새벽에 찬 도시 공기를 마시며 조깅을 하고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체육관에 나가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으로부터 하루 일과를 연다. 그는 대학교 때 핸드볼 선수로 길들였던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서른 살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추세라면 마흔다섯살까지는 군살이 찌지 않은 체격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동하는 그런 육체적 매력을 마음껏 발산시키는 사내였다. 그는 자신의 장점에 대해 수줍어하는 법이 없었으며 즐겨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한 무기로 삼았다. 그에게 있어 인생이란 터전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즐기기 위한 것으로 어떤 다른 목적이 그를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사는 것은 흥분과 사랑으로 충만한 무엇이어야 했다. 그 사랑도 잔잔하고 은은하게 가슴을 적시는 게 아니라 격정적으로 불타올라 남녀의 육체를 폭발적으로 산화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 고로 동하의 주위에는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 여자인가 싶으면 다음주 아니 다음날은 다른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재수없는 바람둥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남녀들은 시샘과 선망이 가득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육체적인 건강과 세련된 용모는 자신을 역겨워하는 도덕군자들의 시선을 깔아뭉개고도 남아돌 만큼 강력하게 그의 정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잡지사는 그의 기질에 딱 들어맞는 직업이었다. 말이 좋아 잡지사지 기실은 외국의 늘씬한 미녀들의 반누드 사진을 오려다가 유명인사의 그럴듯한 글귀와 함께 실어 내다파는 음화(淫畵)와 유사했다. 한 예로 "이달의 시"라는 제목 하에 '너는 곧잘 꿈에서 보았다. 둘이서 나란히 제단 앞에 나아가는 것을, 너는 아내로서, 나는 남편으로서......'로 시작되는 괴테의 '행복한 꿈'을 싣고 그 옆에서 비키니 차림의 금발 미인을 끼어 넣는 방식이었다. 독자들은 그 잡지를 사자마자 여자의 누드에 빠져 인생에 충고가 될 글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건강xx', '러브러브', '섹시걸', '청춘시대'같은 잡지류가 다 그러했다. 목차만을 보면 속아넘어가기가 십상이다. '인생의 꿈', '대망과 성공', '진리의 씨앗', '고민과 싸우는 법', '청춘에게' 따위로 하나같이 건전해 보이지만, 결국 내보이려는 내용은 풍만한 여자들의 히프와 가슴인 것이다. 잡지 '행복한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편집자의 성패 여부는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 갤러리 같은 누드 잡지에서 문화부의 윤리심의를 통과할 수 있는 그림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동하는 잡지사 편집자 자격으로 이따금 값싼 유명인사를 만나 사진을 찍고 쓸 만한 에세이를 얻어 오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보수에 만족하지 못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행복한 여자'에 입사한 은경은 신입사원이 된 지 채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동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이 진실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어쨌든 대단한 플레이보이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그녀로서는 그런 추문을 접했을 때 무감각할 정도로 덤덤한 편이었다. 28이라는 나이에 숫처녀도 아닌 자신이 새침떼기처럼 어머머 그럴 수가 하는 내숭을 떨거나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짐승을 보는 것처럼 경악하고 나아가서는 어설픈 도덕론을 내세워 야멸차게 매도할 만큼 위선적이지가 못했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사내는 다만 한 여자가 아니라 여러 여자와 교제한다고. 엄밀한 의미로 따지자면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의 이성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요즘 세태라면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남녀 중 자기가 진짜 순결의 결정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키스는 한 번 했지만 그건 안했다는 식은 또 얼마나 복잡하고 현학적인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가! 은경이 내심 놀랐던 점은 여자 동료들이 뒤에서 그를 바퀴벌레 대하듯 비방하며 수군대면서도 실상은 그런 분위기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에도 서너 명쯤은 조잘대는 입술 위에 올려놓고 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여자의 수다스런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들은 호기심을 넘어 욕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에겐 용기가 부족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감당할 만큼밖에는 성적 욕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은경은 그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녀는 개방적이었으며 사내를 갖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언제든지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성 철학이었다. 동하를 처음 보았을 때 은경은 유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시선을 보내오는 길목에 지켜 서 있는 것만으로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나는 은경의 얘기를 들으며 세태에 뒤처져 가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이렇게 대담한 행동과 관념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보봐리스트가 됨으로써 상상 속에서 해소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적 애착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이나 거리낌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감증을 호소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불협화음은 유년 시절의 어떤 질곡과 상처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게 하나의 콤플렉스(콤플렉스란 원체험 즉 유년 시절의 강렬한 체험 외에 다른 게 아니다)의 발현이라면 그녀가 고착된 대상은 무엇이며 또한 그 대상에서 그녀가 느끼는 증오와 공포는 어떤 빛깔일까--이런 의구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동성애적인 흥미를 느낀 적이 있나요?" 마침내 그녀의 얘기가 다 끝났을 때 나는 약간 궁색해진 태도로 물었다. "아뇨. 전 변태가 아녜요. 그런 짓은 불결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이런 쪽으로 생각을 돌려 봅시다. 아까 남자와의 접촉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는데 전의 다른 남자와는 어땠나요?" "흥분의 강도를 말하시는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서양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솔직히 실토하자면 그전까지는 오르가즘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경험 부족이었으니까요. 그냥 사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기분, 뭔가 색다른 일을 처렀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었을 뿐이에요." "기분이 좋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요?" "나쁘진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단 말이죠." "그래요." 나는 체위라든가 성교할 때의 반복되는 버릇 같은 것을 물을까 하다가 먼저 존디 테스트(Szondi Test)부터 실행했다. 존디 테스트란 포악한 또는 동성애적이고 우울하고 늘상 공상에 젖어 있는 듯한 사람들의 사진을 여러 장 내보이고 나서, 그중에서 골라낸 사진에 의해 피실험자의 성격을 추측해 내는 방식이다. 이 경우 피실험자의 대개는(사진 속의 인물들은 그들에게 전혀 낯설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는 아주 동떨어진 인물의 사진을 골라낸다. 즉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 사진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가령 우울증의 징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인상을 찡그린 사진을 피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 공교롭게도 정은경이 집어낸 사진은 하나같이 낙천적으로 활짝 웃는 표정들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깊은 마음속에서 응어리진 우울은 빛과 그림자의 어떤 배합일까--나는 이렇게 자문하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밑 언저리에 재빠르게 틱(Tic)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틱, 즉 안면경련은 자기의 의사에 반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히스테리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심장을 꿰뚫는 듯한 내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슬몃 몸을 비틀며 담배를 요구해 왔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나는 책상머리에 놓여 있던 담배를 권하며 불까지 붙여 주었다. 은경은 한숨 섞인 연기를 서너 번 긴 여운을 남기며 내뿜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그만했으면 싶어요. 이상하게도 피곤하군요." 아닌게아니라 그녀는 스스럼없이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내용을 자신만만하게 토해 내고 있었지만, 본심은 상당히 긴장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의 자제력도 이 시점에서 한계를 보이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환자의 기분을 헤아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시죠. 그럼 우리의 만남은 1주일에 두 번으로 정합시다. 별 반대가 없으시다면 전 월요일과 목요일이 좋겠군요. 시간은 오후 2시로 하구요. 어때요?" "좋아요." 이렇게 해서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내가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매달릴 만큼 흥미를 끄는 상대였다. 전에 이런 부류의 환자를 접한 적이 있으나 정은경처럼 노골적이고 고백벽이 심한 환자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얼핏 느끼기로는 그 무애(無碍)함이 가식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하긴 각양각색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노출하는 것에 기묘한 쾌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환자는 남편이 꼬박 밤을 밝히며 자신을 들볶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색한(色漢)이라고 말하며 사실 이쪽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까르르 웃어젖히는가 하면, 첫 남자와의 경험을 남편이 모르고 있는 것에 평생 우월감을 갖고 사는 저명인사의 부인도 있는 것이다. 헌데 이들은 정은경 환자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꼬집어 이거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그런 고백 후에 나의 심판을 기다리는 어린양처럼 다소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정은경은 내심 도전의 칼을 곧추세우고 내 목이라도 벨 듯이 잔뜩 노려보는 음산한 서선을 보내온 거였다. 나는 그녀의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몸짓이 이제껏 굳어진 성격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약속한 다음 주 월요일이 되기까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해 있었다. 도희는 말할 것도 없고 효숙까지도 관심밖이었다. 그 여자들은 이제 클로즈업된 피사체 뒤의 흐릿해진 배경처럼 존재 관념조차 희미해진 상태였다. 도희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했는지 하루는 환자가 뜸해진 때를 틈타 내게 접근해 와서는 "선생님은 냄비 같은 분이에요." 라고 멋대로 지껄여대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요샌 저희들에게 관심이 통 없으시잖아요. 점심을 사 주는 적도 없구요." "내 성격이 변덕이 심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구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뭘 어쩌라는 게 아녜요. 왠지 그 환자(정은경)가 다녀간 후부터는 근심에 싸인 것 같기도 하고 뭔지 몰라도 선생님이 변한 기분이에요." "잔소리 말구 볼일이나 봐." 그러자 도희는 눈꼬리를 발끈 치켜세우더니 꽁해서 돌아나갔다. 지딴에는 걱정이 되어서 내게 투정 섞인 친근감을 보이려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무르게 응수할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한참 후까지 근심이라는 뉘앙스가 내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도희에게 그렇게 비쳤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내 스스로는 그런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으며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환자다운 환자를 만나 기쁘기조차 했다. 헌데 내가 정은경의 등장으로 근심을 느끼고 있다니!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이러한 왜곡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6. 자유연상법 두 번째 정은경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녀를 곧바로 치료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카우치라고 불리우는 의자 외에는 이렇다할 기구가 없는 방이었다.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을 것같이 평온해 보이는 그 의자는 기울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 나는 그것을 30도로 기울여 놓고 은경을 그 위에 눕게 한 다음 연한 녹색의 천장을 바라보게 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 위에 따로 소형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으므로 은경은 나를 바라볼 수가 없는 위치였다. 심리학자에 따라서는 환자와 의사간의 이러한 배치를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네들의 주장은 대면(對面)하지 않는 데서 오는 지루함으로 인해 의사가 환자에게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조는 해프닝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고전적인 방법이 환자의 긴장과 흥분을 누그러뜨리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분이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편안해요." "흔히들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방식을 자유연상법이라고 부릅니다. 들어본 적이 있나요." "글쎄요......" "뭐 좋습니다. 이제 제가 묻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대로만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수치스럽다, 당면한 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선생님을 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완전히 떨쳐 주셔야 합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네." 이렇게 기꺼이 물음에 응하겠다는 대답은 일단 나를 안심시켰다. 이따금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나서 주다가도 정작 자신의 병증이 탄로날 우려에 직면하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접근을 두려워하는 환자를 부지기수로 보아온 터라 적극적인 호응은 치료자로서 더없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 눈을 감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보세요. 나는 아늑하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 그저 편안할 뿐이다 라는 말을 속으로 두 번쯤 반복해 보세요." 나는 얼마간 기다렸다가 말했다. "되뇌었습니까?" "네." "아주 좋습니다. 이제 할 일은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겁니다. 내가 예를 하나 들어 보죠. 물론 이건 허구입니다. 나는 엄마와 시장엘 같이 갑니다. 우연히 좌판에서 신기한 장난감을 보고 그것을 사달라고 떼를 씁니다. 엄만 집에 장난감이 많을 뿐더러 지금은 돈이 없다고 나를 나무랍니다. 그러나 나는 한번 갖고 싶어하는 것을 당장 손에 넣지 않고는 못 참아하는 성미입니다. 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칭얼대다가 그것이 안 먹혀 들자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러대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 마음같이 움직여 줄 기미가 없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엄마는 사납게 윽박지릅니다. '너 어서 안 일어날래? 때려 줄 테야!' 그럴수록 나의 버릇없는 응석은 더해만 갑니다. 엄마는 참다 못해 '그럼 널 여기 내버려두고 가 버린다!'라고 기세 좋게 위협해 옵니다. 하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나는 더더욱 막무가내로 울어젖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찰라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엄마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울음을 뚝 그치고 주위를 둘러본 후 엄마가 없는 것이 확인되자 이번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좀처럼 나타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물녘의 시장통이어서 어둑한 그림자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엄마를 외쳐 부르면서 발길이 닿는 곳으로 뛰어갑니다. 그러나 끝내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나는 미아가 되어 세상에 버려지고 만 겁니다. 두려움은 이제 숨통을 조이고 천길 아래 절벽으로 밀어붙일 듯이 나를 압박합니다. 나는 검은덮개로 눈이 씌워진 것처럼 깜깜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느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어 기억에 남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단순한 보고자가 되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일을 자의적인 왜곡이나 해석없이 나열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셈이었다. 머리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니 길고 곧은 속눈썹 아래로 높게 솟은 콧대가 움찔했는데, 무언가 퍽 눈에 익은 인상이었다. 나는 이렇게 구면이라는 느낌을 자꾸 갖게 되는 이유가 왜인지 기억을 더듬으려 애쓰다가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교외의 한적한 별장 앞 뜨락이에요. 잔디가 푸르름을 잃고 시들해지기 시작했어요. 낙엽도 하나 둘씩 떨어지고 완연한 가을빛이 사방에 물들여 놓았어요. 후박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강줄기가 뻗어 있고 하늘은 쪽빛으로 드높게 펼쳐져 있어요. 주말아침 우리 가족은 따스한 햇빛을 즐기러 밖에 나와 있었어요. 아버지는 몸이 부실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오빠에게 붙어 귓속말을 나누고 있어요. 둘은 아주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는지 웃음을 그치지 않고 있어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의 파라솔 아래 엄마와 언니가 마주앉아 원탁에 금을 그어 놓고 고누놀이를 하고 있군요. 역시 그들도 둘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어요....... 하지만 전 멀리 떨어져서 외톨이가 된 기분이에요. 전 어쩐지 이방인이어서 그들이 축성한 왕국에 발을 들여놓기에는 어색하고 거북한 느낌이에요." "이해하기 어렵군요. 은경 양도 가족의 일원이지 않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런데 왜 부모를 서먹서먹해하는 거죠? 막내라면 더 귀여움을 받을텐데요." "헌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드러나게 힘을 잃고 있었다. "부모가 대경실색한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가요? 그래서 야단을 맞은 후가 아닌가요?" "그, 그래요...... 그 전날 나쁜 짓을 했어요. 아, 아니에요. 그건 나쁜 짓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우연히 목격한 것뿐이에요." "그게 뭐죠?" "언니와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가 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안 응접실에 아무도 없어 엄마를 부르며 인기척이 나는 목욕탕으로 뛰어들었는데--전 절대 훔쳐본 게 아녜요!" 그녀는 결백을 주장하듯 완강하게 소리쳤다. "뭘 보았죠?" "오빠의...... 그건 오빠의 성기였어요. 거뭇한 털이 난...... 엄만 다 큰 오빠의 그곳을 씻어 주다가 내가 들어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어요. 순간적으로 나는 얼어붙듯이 그 자리에 붙박혀 서고 말았어요. 좀 있자 머리 위로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이 쬐끄만 계집아이가 뭘 훔쳐본 게야?' '아, 아니에요. 난 그냥...... '제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엄마는 내 빰을 후려갈겼어요. 저는 너무나 놀라고 분해서 그 즉시 목욕탕을 뛰쳐나왔는데, 그날 이후 엄만 저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해지셨어요." "오빠는 혼자 샤워를 하지 못할 정도로 병약했나요?" "네, 오빤 태어나면서부터 약골이었어요. 그 때문에 부모님은 싸움이 잦으셨죠. 엄만 늘 오빠를 과보호했어요." "부모님의 사이는 어땠나요?" "형편없으셨어요. 서로 못 잡아먹어 항상 으르렁대셨죠." "이혼은?" "앙숙이면서도 헤어지지는 않았어요." "자식들 때문이었나요?" "엄만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었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건 피상적인 이유였을 뿐이에요." "또 다른 이유는?" "선생님이 왜곡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닙니다. 그건 왜곡이 아닙니다. 그 당시 느꼈던 점을 있었던 그대로 말하시면 됩니다." "확실하지 않아요...... 엄만 그 분야에서 지명도가 높은 저명한 패션디자이너였는데, 사회적인 이목이 두려웠던가 봐요." "세상을 두려워했나요?" "그런 정도는 아니에요. 몹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이셨어요." "아버지 쪽은 어땠나요?" "아버진 엄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능하셨어요. 그러나 말 그대로 상대적이었을 뿐이에요. 고시공부를 서른이 가깝도록 하다 실패하셔서 입시학원 강사로 나가셨는데, 그게 인생의 큰 좌절이 되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 중에는 법관이나 검사가 되신 분이 많았거든요. 거기다가 엄마가 아주 아픈 곳을 찔러 화근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술버릇이 고약해지셨고 무슨 일이든 책임감 있게 처리하려는 태도가 사라졌어요." "지금 얘기를 쭉 들어 보니까 엄마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엄마를 미워했나요?" "그럼...... 불효겠죠?" "난 은경 양을 비난할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아까 우리가 한 약속을 잊진 않으셨겠죠? 수치스럽다거나 제가 도덕적 추궁을 할 거라고 지레 움츠러들어서는 안됩니다. 말씀해 보세요." "엄만 절 시기하는 것 같았어요." 은경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통상 여자아이라면 엄마 쪽보다는 아빠 쪽을 따른다고 하대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왠지 주눅이 들어 기를 못 펴는 것 같은 아버지에게 연민이 가기도 하고...... 하여간 그냥 아버지 자체가 좋았어요. 아침 일찍 아버지의 잠자리에 뛰어들어 담배 냄새가 밴 체취를 맡는 게 낙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엄마가 그런 행동을 호되게 나무라기 시작했어요. 심지어는 이런 쌍소리까지 했어요.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게 발랑 까져가지고......'" "그게 성적인 경쟁의식이란 것을 알았나요?" "물론 그땐 12살도 채 안됐으니까 몰랐지만 차츰 나이가 들고 유사한 일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됐어요." "좋습니다. 다시 아까 처음 떠오른 영상(映像)으로 돌아가 봅시다. 언니와 엄마가 다정스레 고누놀이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둘은 사이가 좋았나요?" "저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둘은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갔어요." "어머니는 왜 언니를 더 좋아했을까요?" "언닌 모든 면에서 저보다 뛰어났어요. 공부도 잘하고 미모도 그렇고 센스, 유머감각, 노래부르기...... 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언니만큼 하는 게 없었어요." "열등감을 느꼈나요?" "느꼈어요." "정도는?" "아주 심하게요." "자, 이제 잠깐 한숨을 돌리는 의미에서 내 소견을 말해 보겠어요. 은경 양은 비교적 상세하게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고백해 주셨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군요. 무엇인가 어린 마음에도 외경을 일으킬 만한 강렬한 체험이 수반되었을 것 같은데 그것만 쏙 빼놓은 게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가요?" "불감증이 유년 시절의 지워지지 않을 체험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은경 양이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무엇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실 오빠든 누나든 자신과 다른 이성의 성기를 처음 보게 되는 경우에 받는 충격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까워요. 특히나 한 가구에 보통 자식들이 대여섯 명은 족히 되던 20여 년 전의 우리네 형편을 생각해 봐요. 한방에서 아이들과 부부가 무더기로 혼숙을 하던 때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이 성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경험이 어디 한두 번 뿐이겠습니까? 하지만 그 시절의 경험이 유별나다고 할 순 없어요. 그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 집단으로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는 보고는 없으니까요. 물론 은경 양의 경우 어머니께서 성적인 메세지를 담아 말했다는 것은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요소이긴 합니다만 현재 문제시되고 있는 불감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다행스럽게도 은경은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나의 조언을 수긍해 주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나 하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다가 말했다. "글쎄요...... 굳이 더 말하자면...... 저는 남자 아이들에 뒤섞여 놀고 있었어요. 그곳은 친구 집 뒤뜰이었는데 싫증이 난 아이들이 연탄아궁이 겸 창고로 쓰이는 두 평 남짓 되는 공간으로 몰려들어 갔어요. 거기서 밀치고 장난을 치다가 한 아이가 이런 제안을 했어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자신의 고추를 보여 주자는 거였어요. 까르르대며 웃어젖히기에 정신이 없는 나머지 두 사내 아이도 부화뇌동하며 맞장구를 쳤어요. 저는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여자는 저 혼자 뿐이었으니까요. 어찌된 셈인지 그 아이들은 제가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얼결에 발목이 붙잡힌 저는 할 수 없이 그 게임에 참여하고 말았어요. 조마조마해진 가슴은 그 울림이 미세한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전해질 만큼 벌렁거렸어요. 속으로는 쉴 새 없이 이렇게 빌었구요. '제발 내가 걸려들지 말기를!' 운이 트였는지 처음 노출의 속죄양으로 뽑힌 아이는 그 놀이를 제안한 친구였어요. 그 아이는 약간은 수줍어하면서도 또한 의기양양한 포즈로 재빨리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끌어내렸다가 다시 올렸어요. 그 순간 아이들이 좋아라 하는 탄성 속에서 저는 귀뿌리까지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어요. 그곳을 도망쳐 나오기엔 어린아이들 사이에 통하는 규율이 두려워 그러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보를 낸 저는 다른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가위를 내는 바람에 규정된 벌을 받게 되었어요. 아, 안돼! 난 여자야...... '제가 주저마며 달아날 기미를 보이자, 힘을 합세한 아이들은 저를 벽에 몰아붙여 양팔을 못 쓰게 기운을 뺀 다음 바지의 지퍼를 열고 팬티를 허벅지까지 와락 끌어내렸어요. 저는 무언가 뜨거운 것에 뒷덜미를 채이는 느낌이었는데, 수치심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 짓궂은 사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만 거예요. '얼레꼴라리 얼레꼴라리...... 은경이는 그게 없대요. 은경이는 그게 없대요. 얼레꼴라리 얼레꼴라리...... '저는 가까스로 후들거리는 무릎에 의지해서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있었는데--아아, 저는 나중에 부끄러움보다는 까닭모를 절망감에 깊이 나락하는 자신의 빈약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의 주의(主意)에 의해 그녀가 자신의 치부를 여과 없이 까발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녀의 고백에서는 작위의 냄새가 풍겨났다. 체계적이고 이론정연했지만 그럴수록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엿보인 것이다. 나는 나름으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의 이 자유연상법은 실패라고 자인하면서 치료를 중단했다. "오늘은 이것으로 그칩시다. 수고하셨어요." 바바리 코트를 입는 것을 거들어 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는데, 내 기억은 여전히 막연한 짐작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저--혹시 우리가 과거에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없습니까?" 나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그녀가 핸드백을 집어 들었을 때 말했다. "아뇨. 제 인상이 그렇게까지 평범하고 어리숙한가요?" 하긴 예쁘긴 했지만 확 눈에 띄는 얼굴이 아니라 내가 착각할 수도 있었다. "당치 않아요. 어리숙하긴요. 눈에 익은 것 같아서 여쭤 본 것뿐입니다." "아, 네...... 하지만 전혀예요. 그럼 목요일에 다시 올게요." 나는 그녀가 돌아간 후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해서 불감증의 원인을 밝혀 내려고 애썼다. 흔한 처방으로 그녀가 '나는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여자의 전형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부류의 여자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언제나 퍽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유년 시절의 강렬한 성기원망(願望)으로 인해 질(膣)은 직장(直腸)과 마찬가지이며 다만 하나의 배설공(排泄孔)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여성적인 심리상태에 빠진 동시에 본래 자신의 정상적인 모습은 사내의 것들과 같았지만 성적 장난을 한 죄로 부득이하게 음경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는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세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여자로서의 제 가치를 스스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남자에 대해 부러움과 약탈하고 싶다는 양가(兩家)감정을 느끼며 심할 경우 원한까지 품게 된다. 그리고 자주 발견되는 바와 같이 이런 여자의 부모는 극히 사이가 나쁘다는 점이다. 특히 아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능력이 우월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어머니를 둔 경우 그 딸은 아버지에게 고착(Fixation)되어 여자로서의 생물학적인 특성(오르가즘을 포함한 임신, 출산)마저 포기하려는 경향이 농후해지는 것이다. 일견, 정은경의 증상이 이와 유사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위협적인 어머니, 성기원망 그리고 와디푸스(Oedipus)콤플렉스 따위가 복합적으로 먹구름이 되어 그녀의 원체험의 일부를 어둡게 뒤덮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체험과 불감증 및 질괄약근의 경련(Virginismus, 그 언저리가 극도로 민감해진다)이 의학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리학자들 사이에는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심인성 불감증이란 성교할 때 자기가 여자라는 것이 싫어 생리적인 저항을 표명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언제나 자신을 개방시켜 놓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은경의 면모는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까? 적어도 그녀의 대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성관념을 유년 시절의 어두운 체험 때문에 고통받는 여자의 성격의 일부로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는 점이 있었다. 사내가 바람둥이인지를 알고도 사랑할 수 있는 여자란 극히 드물 뿐더러, 그녀의 정신 상태 또한 그러한 끼를 가지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과히 빗나간 것이 아니라면 정은경은 아직 감추고 싶어하는 것의 핵(核)은 내게 조금도 보여 주지 않은 셈이 된다. 결국 나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감정은 정신과 의사로서 감당해야 할 느낌 이상의 것은 아니었지만, 착잡한 기분이 지속되자 나는 그녀에게 단단히 벼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7. 돈 후안의 사고방식 내가 속았다는 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분석치료의 진전을 저해시키는 환자의 반응 즉 저항(Resistance)에 직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항이라는 것은 방위적인 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환자가 자유연상법에 순종할 수가 없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순종 못하는 일' 자체를 중요 증상으로 보고 다루지 않으면 환자 스스로가 치료를 막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더욱이 정은경처럼 지능이 높아 보이는 환자의 경우에는 이쪽의 의도를 미리부터 제압하기 위해 선수를 쳤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녀는 정신분석에 문외한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문답을 주고받는 자유연상법에 따라 유년 시절의 먼 과거를 윤색함이 없이 솔직히 털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녀의 양순한 고백 모두가 하나같이 거짓이고 무언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짜낸 술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확신이 드는 것은 그녀가 자기의 불감증은 신경증에서 비롯된 것이며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해소되지 않는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안 그러고서야 그렇게 주저하는 기색조차 없이 '성기에 관련된 기억들은 막 찍어낸 영화의 자막처럼 생생히 떠올릴 리가 만무했다. 세 번째의 만남에서 나는 좀 특별한 시도를 해 보았다. 여느 보통 환자들과는 달리 당면 문제를 제쳐 두고 그녀가 한 사회인으로서 어떤 성관념을 가지고 있는지(이미 윤곽은 드러난 셈이지만) 알고 싶었던 것이다. 거짓 없이 시인하자면 이러한 발상은 내가 성에 개방적인 사람들을 지독히 혐오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두피수집가(頭皮蒐集家, 여자를 사귀자마자 곧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내를 일컬음)와 천박하고 헤픈 끼가 넘쳐 흐르는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심리학의 권위자 칼 메닝거가 주장하듯이 그러한 사내와 여성의 진정한 본성은 조금도 사내답다거나 여성답지 못하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는 순결은 신성한 것이요 거룩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며 법적인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순결을 잃었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벌써 패배를 당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서 순결을 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빛을 잃은 것이요 신성을 저버린 사람이요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요 장래에의 불행을 자기 스스로가 초래한 사람이라는, 어찌 보면 고루하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제껏 치료를 해오는 동안 이런 완고한 도덕관념으로 인해 환자들을 움츠러들게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내 신념을 강요하는 바보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어쨌든 약속 시간에 정확히 나타난 그녀를 카우치에 눕게 한 다음 나는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지난번엔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상담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이런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글쎄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은경 양은 혼전 성경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도덕적 단죄를 내리시는 건가요?"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머리회전이 훨씬 비상한 것 같았다. 대뜸 몇 단계의 논리 전개 과정을 뛰어넘어 핵심을 찔러 오는 것이어서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아니 그렇지가 않아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단지 은경 양의 깊숙한 내부에서 성관념에 대한 갈등과 진통을 겪은 경험이 있지 않았나 해서요." "사춘기 시절을 말하시는 건가요?"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에요. 생리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고통과 변화를 묻는 겁니다." "글쎄요...... 그런 적이 있었나?" 은경은 암팡진 이마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골똘히 더듬어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한동안 아무 대꾸가 없어 나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순결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속히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찌꺼기에 연연해하는 구닥다리들이 아닌가요." "하지만 결혼을 앞둔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특히 여자들이 부모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고 아직은 구속과 억압적 기능이 강력한 사회적인 통념 또한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드러나 보이기에는 욕구를 자제하는 것 같지만 내심은 용기가 없어 주저하는 것뿐이에요." "순결이 과연 용기만의 문제일까요? 그것은 보다 진지한 인생의 본질적인 측면과 결부된 무엇이에요. 적어도 한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가치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죠. 이를테면......" 나는 순결을 설명하려 들자마자 추상에 빠져 들고 있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다. 순결! 나 자신도 그것에 대해 남달리 유별난 관념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것에 초조하게 얽매어 있으며 색골취향이나 성적 위선, 바람기 같은 말만 들어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못 참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상주의잔가 봐요?" 은경의 질문이 내 정신을 일깨웠다. "그렇진 않아요. 난 다만......" 그러다가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환자 앞에서 이렇게 주저하는 인상을 드러내기는 처음이었을 뿐더러, 이러한 권위의 부재가 환자의 치료 소망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정은경은 내 마음의 파문에도 아랑곳없이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가 나를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생님은 저 같은 여자를 미워하시는군요?" "아니오.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부인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숨결에서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걸요. 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어요. 뜨겁고 정열적인 무엇이 선생님의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아요." "날 잘못 본 거요. 난......" 나는 그렇게 부인하려다가 그녀가 보여 온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은경은 자신의 문제를 주체하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과거에도 몇 번인가 환자와의 치료 상담 중에 흥분한 적은 있어도 내 쪽에서 이렇게까지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혼란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는 환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지적인 자제력, 매사에 본질을 꿰뚫는 능력, 청취의 집요함 등 평범하지 않은 인식력을 가지고 내 감정의 요소요소에 청진기의 흡판을 대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객전도의 순간이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나는 무력한 환자가 되어 근엄한 여의사의 추궁 앞에서 대책없이 쩔쩔매는 꼴이었다. "전 저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남을 경멸하는 성미는 아니에요. 물론 그런 사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서두요." "친구들이 너무 앞서 가는 은경 양의 생각을 싫어할텐데요?" "과민반응이에요. 전 제 성관념이 그렇게까지 혁신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많은 주위 사람들이 절 부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 예로 얼마 전에 저희 집 근처 도서관에서 강연회가 있었는데, 강사가 한동안 외설시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인 마광수 교수였어요. 그분 말로는 예상 밖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와 노골적으로 성 문제를 상담한다는 거였어요. 더구나 강연회에 참석했던 주민들의 95% 이상이 주부들이거나 결혼을 앞둔 처녀들이었는데, 그분이 음탕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히히덕대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그 여자들의 얼굴은 지난밤 남편 몰래 보았던 포르노 속의 거대한 물건을 연상하는 것 같았어요." "그분은 정상적이 아니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시를 몇 편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권태'란 소설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요? 그 모든 열광적인 독자들도 비정상적이란 말인가요?" "그 책을 읽어 보았나요?" 나는 대답을 회피한 채 '가자 장미여관으로'의 한 구절인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 저쩌구/세계의 운명이 자기의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가자, 장미 여관으로!'를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보나마나 야한 연애소설일텐데 내용이 마음에 들던가요?" "그러믄요. 제 마음에 쏙 들었어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위선을 경멸하는 그분의 솔직한 성격과 자유분방함이 부러웠어요. 편견에 진배없는 관념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열정도 돋보였구요." "그분이 말하는 해방은 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하지만 과연 그것을 성의 굴레하고 볼 수 있을까요. 한 남자와 여자가 평생을 진지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굴레에 발목이 잡힌 어리석은 인간들의 못나빠진 행위에 불과할까요. 그분은 욕구를 발산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 같더군요. 공동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미덕조차 버리라고 말하는 것도 같구요. 어떤 여성지의 좌담회에선 우리가 한 가지의 음식에 만족할 수 없듯이 성적인 대상도 유독 하나에 구애를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더군요. 난 한마디로 기가 찼어요. 마 교수는 인내와 절제력을 저버린 저급한 인간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자신의 무치(無恥)와 부도덕을 자유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려는 위선자 같기도 하구요." "마 교수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분은 상상 속에서 원고지라는 지면 위에서 카타르시스를 즐기려는 욕구와 미학을 가진 소설가일 뿐이에요. 누군가가 그분에게 '당신은 변태야!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고 비난을 퍼부어댄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아마 마 교수는 조용히 미소지으면서 자신의 시를 읊조릴 거예요. '내게 사랑이 오면, 온종일을? 그녀와 함께 신나게 변태적으로 보내리......'" "그런 인간을 두둔하는 건가요?" 나는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두둔할 필요도 없겠죠. 저 자신이 그런 인간이니까요." "은경 양은 변태가 아니라고 했잖소?" "물론 전 게이도 레즈비언도 아니에요. 항문섹스의 경험도 없고 젊고 패기만만한 천재 시인 장정일처럼 항문 앞에다 '예쁜'이라는 형용사를 갖다붙이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전 자유롭고 싶어요. 지금은 동하 씨를 사랑하지만, 만일 그가 싫어졌을 때 다른 누구와도 섹스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이 이따금 자신에게 도덕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나요?" "전혀예요. 전 오히려 그런 이유로 심리적 갈등을 느끼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쾌락의 창출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는 속물들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가요." 정은경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나의 흥분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여자 돈 후안(Don Juan)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섹스에 대담한 것 같았다. 인생은 육체적 쾌락으로 충만한 무엇이어야 하며, 인생에는 깊이가 없다고 믿는 족속들! 질적인 가치는 모두 사상(捨象)되고 양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대량생산의 원리와 다수결의 원칙을 인간 본성에까지 도입해 보려는 실험주의자들! 나는 돈 후안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은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일 그녀와 내가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피차 인간이라는 동물에 환멸을 느끼며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조그만 운명이라면 피해 갈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치료해야 하는 건 의사로서의 의무였다. 동시에 치료의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나는 별안간 책임을 지고 환자를 고쳐야 한다는 사실에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은경의 증상은 내가 알고 있는 의학적 심리학적 지식 이상의 무엇인 것 같아서 부담이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을 나에게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기준에 의하면 나 자신은 구질구질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 같았다. 몸뚱이가 있고, 눈이 둘, 코 하나, 두 다리가 있고 그 사이에 성기를 간직한 지적 생명체, 여자 아니면 남자, 그래서 여자면 남자, 남자면 여자 꽁무니를 밤낮없이 쫓아다녀야 하는 숙명! 이런 철학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한 척 내숭을 떠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며 성욕과 식욕을 빼면 남을 게 없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방탕과 황음을 즐기는 천박한 무리들의 비양심을 정당화시켜 주는 논리가 되어지는 것에는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정작 내 화를 부채질한 것은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뻔뻔스러움이었다. 사내들만 보면 거대한 음경을 연상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음담패설과 농염한 페팅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여자가 자신은 수많은 남성을 거쳐왔고 또 편력해 갈 것이지만 '절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도대체 한 번도 점잖을 빼 본 적이 없는 바람둥이가 성에 불만족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당신은 얼마나 더 많은 수의 남자를 거쳐야 그 병이 낫겠소?'라고 내뱉을 뻔하다가 입을 조심하여 이렇게 말했다. "은경 양은 성에 관한 한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개방적이라는 것은 구애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해요. 원하는 것은 언제나 가질 수 있고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그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요. 그렇다면 여태까지 말한 것이 전부 거짓이거나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밖에 안돼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틀렸어요.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감추고 얘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의심이 나시면 어디 저를 한 번 시험해 봐요. 제가 과연 오르가즘을 느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건지 말이에요." 그러며 정은경은 스커트를 걷어 올리려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굉장히 흥분한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내 추측이 빗나갔다면 그녀의 치료는 이 순간부터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우윳빛 허벅지를 내보이며 나를 유혹하려는 그녀의 민감한 반응이 의아했지만, 나 자신도 감정이 고조된 터라 당장은 지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 하에 도희를 치료실로 불러들여 은경에게 찬물을 마시게 했다. 다행히 그녀는 금방 이성을 회복했다. 도희가 나가자 그녀는 잘못을 뉘우치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니오. 내가 과민했던 것 같소. 오늘은 이쯤 해 둡시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행여 그녀가 이런 불쾌한 경험을 빌미로 다음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을까 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녀가 성에 지극히 관대하다는 사실 외에 이날의 만남에서도 병인(病因)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었다. 은경이 돌아가자 나는 이제나 저제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환자를 물리칠 정도로 허탈감에 빠져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은경에게 온 정신이 빼앗겨 있었다. 그녀의 마력은 단지 학문적으로 호감이 간다는 도를 지나쳐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나를 옴싹 못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 심지어 나는 무기력하게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피곤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나는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밖에서 대기하는 환자가 조급해하는 것 같아 도희를 불러 박카스를 하나 사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녀가 치료실을 나가기 전 책방에 들러 마광수 교수의 '권태'도 사 오라고 부탁했다. 일을 마칠 퇴근 무렵 나는 도희에게서 건네 받은 그 책을 펼쳐 들었는데(내가 그 책을 산 이유는 오직 하나 정은경이 읽었기 때문이다) 겉표지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어 눈이 갔다. 아프지 않으면 권태롭다 전쟁이 아니면 평화 가 아니라 권태다 고생 끝에 낙 이 아니라 권태다 사랑 끝에 결혼 이 아니라 권태다 오르가즘은 없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오르가즘은 없다 오르가즘은 없다. 오르가즘은 없다...... 모든 강렬한 체험(고통, 전쟁, 사랑) 뒤에는 따분함이 드리워질 뿐이라는 쾌락과 정열의 사상이 마 교수의 주된 철학 같았다. 이 철학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예에 빛나는 유럽의 낭만주의 시인들과 퇴폐주의자들, 화가 뭉크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에까지 이어졌었다. 나는 정은경이 시속 200마일까지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다가 털털거리는 고물 버스를 타게 된 기분이라든가, 홍역이나 끔찍한 열병을 앓고 난 후의 흐리멍텅함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벌써 인생을 다 살아 버린 것이다. 그녀는 강렬한 쾌락을 추구해 왔으며 그 극에 가서 거만을 떨며 인생을 내려다보아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흥분과 쾌감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자극으로는 반응조차 보일 수 없게 된 중독자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오르가즘은 없다! 나는 이렇게 짐작했지만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은경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퇴근길에 도희가 신설된 대구 타워에 구경을 가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해발 110미터의 두류산 공원에 세워진 탑신 153미터의 전망대는 벌써 대구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내가 집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집에까지 따라오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남의 심경을 헤아릴 줄 모르는 그녀의 우둔과 몰염치에 신물이 난데다 내 별장은 남구 매자골에서 앞산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도보로 20여 분쯤 들어간, 후미진 산자락을 휘감고 있는 외진 곳이라 버스 노선이 변변치 않았기에 밤늦은 시각에 도희를 돌려보내기 위해 승용차를 몰고 나오기가 싫었지만, 그녀의 고집이 워낙 융통성이 없어 잠깐 집구경만 시켜 주겠다고 허락했다.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드넓은 정원과 1,2층을 합쳐 건평이 90평이나 되는 집을 둘러보고 나서 도희가 한 말은 일전에 거실의 플러그를 고쳐 주러 온 전기공이 한 말과 같았다. "이 넓은 곳에 혼자 살아요?" "아무렴 어때." "외롭지 않으세요?" "시끄러운 것보다야 낫지. 커피 한 잔 마실테야?"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적당히 방문에 대한 예의의 수준을 밟고 나서 일찌감치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희는 선생님이 타 준 거라 더 맛있다고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후에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내가 가라고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쳐서 이것저것을 캐물으며 입을 봉새하려고 노력했다. "이젠 가야지." 2시간이 넘자 나는 그녀와의 속빈 강정 같은 화제거리와 독대를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전 더 있고 싶은걸요." "다음에 또 기회를 갖자구." "정말이에요? 언제 부를 건데요." "자자,--일어서자구." 이렇게 억지로 떠다밀다시피 해서 그녀를 큰길까지만 걸어서 바래다 주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밤이슬에 젖어 들고 있었다. 내 구둣발 소리에 어우러져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둠은 커튼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고독! 대기처럼 들뜨고 공허하며 북소리 같은 절박함이 엄습해 왔다. 대구에 내려온 후 처음으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며 행여 도희가 돌아오지 않나 살폈다. 끝도 없는 길이 잡초 사이를 가로지르며 구릉지를 타고 뻗어 있었다. 나는 도희를 차로 바래다 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잡념을 얼른 떨쳐 버렸다.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성에 차지 않는 대인관계를 아쉬워하는 것에 나는 훈련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자족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독불장군식의 삶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내심 냉소적으로 살아 왔다. 그런데 달빛이 뿌연 오늘 밤 이러한 믿음에 틈입이 있을 수 있다는 자각을 하는 건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미친듯이 별장의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서 주위 사물에 대한 인식이 빠른 속도 속에서 퇴색되고 무화되어 내 실체만이 부각된 채 온 정신이 자아에 집중되기를 바랐다. 샤워를 하고 나서 한결 마음이 가라앉자 나는 다시 정은경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 갈 수가 있었다. '권태'를 펼쳐 들었다. 새벽 3시까지 단숨에 독파했다. 그 책은 성에 대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담고 있었는데, 책상에 엎드려서 불편한 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학교의 내 방은 그리 크지 않고(한 여섯 평쯤 될까) 겨우 책이나 쌓아 둘 정도의 크기인데도 난 그곳이 마치 포근한 모태(母胎)나 자궁 속같이 느껴져서 좋았다. 8. 형사와 살인 용의자 현대에 들어와 불감증은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대가 내지는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 슈테겔이라는 학자는 '20세기는 성불구자의 시대이며 특히 상류층을 차지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불감증 환자이다' 라고까지 잘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의학계에서조차 터부(Taboo)로 되어 있음은 빅토리아 왕조 또는 그 이전의 위선이 지금도 완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감증의 마돈나'로 호칭되는 빅토리아 시대 윤리관의 찌꺼기는 남성은 공격적이고 성적으로 충만한 반면 여성은 수동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불만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적 편견의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서구에 비해 이런 억압적 통념이 결코 덜하지 않은 우리의 유교적 기준으로 볼 때, 여성들이 당해야 했던 고통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애정관 또는 변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숫총각이나 숫처녀에게 천연기념물이라는 별칭을 붙여 준 것이 그 적나라한 예라고 하겠다. 정은경은 시대의 변화에 편승해서 자신의 내부에서 폭발하는 욕구를 정당화시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남자들을 겪어도 상관없는, 아니 나아가서는 겪어야만 자신의 인간적인 가치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그런 그녀에게 어째서 불감증이 생겨난 것일까? 히스테리의 전형적인 특징이 기관 그 자체를 포기하는(욕정이 두려워 거세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대신 그 기관의 기능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불감증이 히스테리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정설로 돼 있다. 다시 말해 여자의 불감증에 관해, 그 원인이 히스테리컬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무의식적인 목적과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질의 형태 또는 기능을 변경하는 데서 생김을 의미한다. 포탄이 빗발치는 참호 속의 군인에게 일어나는 쉘쇼크(Shell Shock), 즉 공포 때문에 몸이 마비되는 현상은 편리하게도 그 군인의 다리가 더 위험성이 짙은 전선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 주지만, 또한 그를 적당한 안전지대로 피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초의 목적인 보신(保身)에 위배될 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런 방위(防衛)는 설사 한 소원의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다른 소원에 위반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흔히 증후(Symptom)라 부르는 이 이율배반성은 결국에는 자기파괴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여성의 불감증도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감춰진 무의식적인 의지는 일견 목적을 달성하겠지만,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는 엄청난 결과 앞에 모든 건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이 심술궂은 장난꾼--인간에게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의 정반대, 즉 가장 불리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추리소설의 시조 에드가 알란 포우는 이러한 속성을 심술궂은 장난꾼이라 불렀다--이 정은경을 속인 것은 뭘까? 며칠 동안 내 일과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은경의 불감증에 골몰해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와 만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까닭 모를 초조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초조한 기대를 걸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내 몸 속에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아드레날린이 증가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내가 흥분할 일이 뭐란 말인가. 그녀는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에 불과하며 할당된 시간만큼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으로 내 임무는 충분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다독거렸지만 시침이 약속 시간인 2시를 향해 치달을수록 안정감을 잃어 갔다. 정은경이 앞 환자와의 상담을 마쳤을 때 억센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찍어 누르는 듯한 아찔함마저 들었다. 마침내 효숙이가 노크를 하고 들어섰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혼자였다. "정은경 씨는?" 내가 말했다. "오지 않았는데요. 다음 환자를 부를까요?" 효숙은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그녀와는 아직 공작비둘기의 변사가 불러일으킨 감정의 앙금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앞으로도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며 얼마간 거리를 둘 작정이었다. 효숙으로서도 당장은 그러한 벽을 허무러뜨릴 의사가 없는지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아냐, 좀더 기다려 보지." 그러나 은경은 2시 2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도희가 한 번 다음 환자를 상담하지 않겠느냐고 묻기 위해 들어왔다 나갔다. 나는 미국 베데스타 병원에서 발간한 임상기록 책자를 뒤적이고 있었으나, 꼬부랑 글자는 한낱 지면 위에 뿌려진 잉크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버릇처럼 담배를 빼어 물고 창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노크 소리가 나고 효숙이가 다시 들어왔을 때 나는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다음 환자 들여보내." "저기,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누군데?" "모르겠어요. 낯선 남자 분이에요." "무슨 용건이래?" "중요한 일이라 선생님에게 직접 말씀드리겠대요." "글쎄, 환자가 밀렸을텐데......"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허락했다. 들어온 사내는 검은 재킷 차림의 건장한 체구로 역삼각형의 밀가루반죽 같은 얼굴에 활활 타오르는 석탄 두 알을 쑤셔박은 듯한 눈의 소유자였다. 그 충혈된 눈으로 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성큼 데스크 앞으로 다가와서는 악수를 청해 왔다. "신승환이라고 합니다." "네, 어쩐 일이신지요?" 나는 두툼한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사내가 신분증을 내보이기 위해 잡았던 손을 놓았을 때 거대한 솥뚜껑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형사시군요. 그런데 무슨 일루?" 나는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형사는 무표정한 눈길로 쏘아보며. "앉아도 되겠죠?" 하고 요구해 왔다. "그야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5분 이상은 시간을 낼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들어오시다가 보셨겠지만 기다리는 환자들이 줄을 지어서요." 형사는 내 말을 흘려 들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의 행동방식이 여실히 배어 있었다. "들어오다가 간호원한테 들었는데 환자의 진료 카르테는 볼 수 없다면서요?" 형사가 재떨이에 담배를 털었다. 손톱 사이에 까만 때가 낀 거친 손가락이 보였다. "물론입니다. 그 때문에 오셨다면 헛수고하신 겁니다." 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퉁명스러운 소리를 냈다. "뭐 좋습니다. 그럼 용건을 말하죠. 제가 여기 찾아온 건 선생님의 협조를 얻기 위해섭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형사가 내 반응을 살피는 것을 느끼며 나는 묵묵히 대꾸했다. "다름이 아니라 정은경 양의 문젠데...... 이걸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형사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독백을 하듯 중얼거렸다. "은경 양은 오늘 나오지 않았는데요." 얼버무리는 의도를 지레짐작한 내가 이 형사는 정은경과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영영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 무슨 사고라도?" "아닙니다. 사고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나는 왠지 조바심이 났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 내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자 형사가 계속 말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냐고 생각하시겠지요. 허황된 얘기인지 아닌지는 들어 보신 후에 판단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아무리 하찮은 얘기라도 절대로 남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정은경의 신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나는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눈앞에 사내는 그다지 신뢰가 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협조를 부탁하러 왔다는 친구가 친절과는 거리가 있고 말투도 그렇고, 선입관이긴 하지만 그다지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 첫인상도 그랬다. 그러나 형사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한 번 물어 왔을 때 나는 결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전 지난 1년간 정은경 양을 뒤쫓아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은경 양이 살인용의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인용의자요?" 나는 무대 배우가 대사를 외우듯 드러나게 놀랐다. "은경 양이 살인용의자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 당장에 체포하지 않는 겁니까?"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증거도 없으면서 어떻게 은경 양이 살인자라고 단정할 수가 있는 거죠?" "육감이 시대에 뒤떨어진 수사방법이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따금 우회적이고 체계적인 수사보다 재빨리 본질을 꿰뚫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죠. 더구나 그 살인이라는 게......" 거기서 형사의 미간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참담한 고통과 번민이 교차된 얼굴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를 태워 물고 있었다. "피살자는 그녀의 언니입니다." "언니를요?" "사이코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은경 양이 이 병원에 통원 치료를 하게 되면서부터 제 확신은 더욱 굳어져 갔습니다. 헌데 우리가 아직도 자신을 뒤쫓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며칠 전부터 낌새가 수상하더니 마침내 오늘 아침 행방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감시를 느슨하게 한 게 화근이 된 셈이죠. 조금 전 환자의 카르테를 보여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렇게 물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은경 양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지 않던가요?" "그건 말할 수 없소." 나는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도 있었지만 원칙에 관한 문제라 녹녹하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검찰총장이 온대도 쉬 변할 수 없는 결심이었다. "부인하는 것은 아니란 뜻인가요?" "이봐요. 피곤한 입씨름은 그만둡시다. 환자의 병증에 관해선 한 마디도 입에 담을 수 없어요. 그건 극히 비밀스런 프라이버시입니다. 저를 믿고 찾아오는 환자를 배신할 수 없어요." "그럼 전 고백한 걸로 믿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나는 쓸데없이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워언 참! 애들처럼 떼를 써서야...... 그녀가 그런 고백을 한 적은 없었소. 더 이상 그녀의 병세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겠죠? 자, 다음 환자와 상담이 있으니 그만 했으면 돌아가 주시오." "아, 잠깐! 잠깐만요. 제게도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전 누구를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전 진실을 밝혀 내려는 것뿐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목적인 의사 선생님처럼 제 입장이 동정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그래서 말씀 드리는 건데 어쩌면 은경 양이 선생님과는 접촉을 시도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연락이 오면 이쪽으로 전화를 좀 해 주시죠." 형사는 명함을 꺼내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네들이 미행을 했기 때문에 도망을 간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곳에 연락을 취해 온단 말이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그녀가 연락을 취해 올 곳은 직장동료인 애인과 이곳밖에는 없을 겁니다. 평소 워낙 대인관계를 꺼려했던 여자였으니까요. 애인 쪽은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연락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그럽시다. 연락이 오자마자 내 즉시 알려드릴 테니 염려 놓고 돌아가세요."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자 형사도 두말 않고 몸을 돌려세워 나갔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심을 위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무관심과 낯선 사내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아니었다면, 정은경이 살인자라는 그것도 언니를 살해한 정신질환자라는 말에는 뒤로 나자빠져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정은경에 대한 나의 관심은 각별한 데가 있었으므로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형사가 방을 빠져 나간 지금 그의 말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사내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과는 별개에 속했다. 불의의 충격을 받은 탓에 정신이 멍해져서 사리분별력을 잃은, 한마디로 오리무중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어정쩡한 기분과 태도로 환자들에게 미안함마저 느끼면서 일과를 마감했을 때 엄습해 온 것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암담함과 불신감이었다. 아울러 헛바람에 머리를 쥐어짜며 며칠을 고민했던 나 지신의 한심한 무위에 그저 망연해질 뿐이었다. 마침 연구해 볼 만한 환자를 찾았다는 흥분과 열의는 잠시 잠깐 스치고 지나간 봄바람에 불과하고, 급기야는 그 사품에 설레였던 가슴의 들뜨임마저 내가 의식적으로 몰아치고 부추겨서 생겨난 허구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가 찾아왔다. 그러자 뻥 뚫린 가슴을 통해 정은경이라는 실체가 빠져 나가고 나 자신은 초라한 과거로 되돌아와서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 효숙은 입술에 집게를 매단 듯이 뾰로퉁하고 도희는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유혹의 마수를 뻗쳐 올 것처럼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효숙과 냉담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무래도 도희와의 접촉이 잦았던 것이 사실인데, 내가 현란한 화장과 선정적인 옷차림을 호되게 나무라면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그저 조심하겠다는 수줍음을 보여도 일단 돌아서면 말짱 도로묵인 아가씨였다. 오죽했으면 언젠가 한 번은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라는 책을 사 읽어 보라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 '재미있어요?'라는 물음에 그 책을 정독하면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것인지 다 나와 있다고 하자 꼭 사 보겠다고 되풀이 대답하던 그녀였지만 그 후 그것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흥미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가 읽고 자신의 생활 태도를 반성했으면 싶었던 내 주제넘은 욕심은 그 책에서 이런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 그러기에 얼굴 화장이라든가, 굽이 높은 샌들을 신는다든가, 굽이 높은 신발을 숨기기 위해 옷을 길게 해 입는다든가 하는 짓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형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나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경시하고 인공적 재료를 사용하여 미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줄기찬 욕구를 경멸하고 있었다. 흔히 화류계의 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짙은 화장의 천박함, 콤플렉스를 없앤다는 미명 하에 열병처럼 번져가는 성형수술, 유방의 둔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실리콘 젤리를 삽입하고 뼈를 깎아 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그 집요함 ---이 모든 것이 욕정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짐승 같은 사내들의 눈빛에 자극받은 음핵이 가면을 쓴 얼굴에 다름아니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정은경이라는 흥미 만점인 대상을 잃고 이제 서먹서먹해진 효숙과 외면하고 싶은 도희의 주변으로 돌아와 맹맹한 일상사에 빠져 들어야 한다는 낙심은 나를 못 견디게 한다. 9. 거부 못할 편지 정은경은 생각 이상으로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했던 모양이었다. 며칠간 술잔에 코를 쳐박고 허황하게 비워진 가슴을 달래려 했던 것은 갑자기 지루해진 일과를 비켜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상당 기간 이어지리라고 여겨졌던 것인데-- 그 며칠 후 먹는 것에마저 의욕을 잃고 있던 나에게 밖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도희가 미끈한 각선미의 탤런트가 표지모델로 나온 주간잡지와 발신인 불명의 편지 한 장을 데스크 위에 놓고 갔다. 제딴에는 내가 따분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심심풀이로 읽을 거리를 제공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간지는 쓰레기통 속에 쳐넣었다. 그리고 나서 무심히 편지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 들었는데 -- 아아,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헌데 그녀와의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에 왜 내가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나는 흥분한 나머지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에 바빴다. 곽 선생님께! 병원을 드나드는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과연 저를 기억하실지 몰라 제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요. 정은경이에요. 불감증으로 두어 번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죠. 바라건대, 저를 기억하시는 것으로 믿고 얘기해 나가겠어요.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군요. 약속한 날 나가지 못한 것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것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사적인 것이라....... 어쩜, 이렇게 어리석고도 바보스러운지! 선생님이 자유연상법을 말씀하시면서 금지사항으로 달아 두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수치스럽다고 해서 꺼리는 것은 치료에 방해가 된다구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 환자의 입장에 설 수만은 없답니다. 저는 곤경에 빠졌어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외에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치료되어야 하는 환자의 질환이라기보다는 저지르지 말아야 했을 지나간 과거의 과오에 해당하는 것이라 선생님에게 부담스런 피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를 무릅쓰고 펜을 든 것은 저에게 불어닥친 불안과 고통의 일부분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빌려 해소해보고자 하는 이기적인 의도에서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지금 모처의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나올 때 10여만 원밖에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동하 씨에게 달려갈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입니다) 곧 수중의 돈이 떨어져 낙엽이 찬바람에 뒹구는 싸늘한 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입니다. 어제부터는 돈을 아끼느라 식사도 한끼 거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나마 금도금을 한 스위스제 시계를 담보로 숙박비를 대신하지 않았더라면 싹싹한 인정미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매몰찬 중년의 여주인으로부터 무슨 험악한 꼴을 당하며 내쫓겼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구체적으로 여력을 쥐어짜 억지로라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틀 뿐입니다. 그동안 어려우실 줄은 알지만 백만 원만 융통해 주셨으면 하는 게 저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거절하신다면....... 하지만 저는 믿고 싶습니다. 추신: 저 좀 보세요. 제가 이렇게 경황이 없답니다. 돈을 건네주고 받을 방법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달리 생각나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K대의 노천강당이 어떨지 싶군요. 빈번하게 학생들이 오가는 그곳은 눈여겨보는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도 가깝고 저도 잘 아는 장소이기 때문이에요. 내일 모레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쯤 계단의 정중앙 옆에 앉아 있겠어요. 그리고 이건 순전히 신뢰의 문제로서, 선생님의 동정어린 선택이 빚을지도 모를 금전적 손실에 대한 담보로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환자 진료카드에 써낸 것처럼 수성구 범어동 우방 아파트에서 이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미심쩍다면 단지 경비실로 전활걸어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참! 제가 몇 번인가 전화로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그곳 병원에 근무하는 아가씨가 협조해 주지 않아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편지를 띄운 겁니다. YKMES 편지를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좀 어리벙벙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낙심에는 희망이 생겨난 셈이었지만, 그 만남이 이런 수상쩍은 편지를 통해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거기다가 강력계 형사가 끼어든 일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정은경에게 돈을 꿔 주는 행위가 범인의 도피자금을 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아울러 실상을 알지도 못하는 살인사건에 하루가 바쁜 내가 말려들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하는 무관심한 이기심이 작용했다. 사실 백만 원이라는 돈을 신용보증 하나 없이 빌려 주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대구에 내려오면서 이곳저곳에서 당겨 쓴 자금이 적잖았던 처지로서, 그녀가 두어 번 나의 진료를 받았다는 것과 집주소를 안다는 것 정도로 선뜻 돈거래를 하는 성급함이야말로 빙충맞은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우기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형사를 한시라도 빨리 내쫓기 위해 빈말로 내뱉은 것이긴 했지만, 정은경에게서 연락이 오자마자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것 또한 부담감으로 짓눌러 왔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편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은 다음 도희를 불러들였다. 정은경의 절박한 부탁을 들어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는 별도로 외래 통화를 취급하는 그녀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였다. "요 며칠 새 정은경 환자로부터 전화온 적 있었지?" "저, 정은경 환자요?" 도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왜 내게 알리지 않았나?" "......." 도희는 침묵으로 잘못을 시인했다. 적어도 그녀의 숙인 고개 밑으로 수치심과 민망함이 뒤섞여 있을 곤혹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애인 행세라도 하듯 그녀가 도발적이리만치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질투심이 끓어오른 눈길로, "아까 제가 드린 편지 정은경 환자에게서 온 거죠?" 라고 되묻는 기세에는 그만 기가 질려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역시 그랬군요." 이어 그렇게 덧붙인 그녀의 침울하게 가라앉은 탄식은 내가 거짓말을 할 여유에 쐐기를 박았다. "그래, 그 환자의 편지야! 헌데 왜 가운데서 농간을 부렸지?" 나는 의식적으로 정은경과의 거리를 두려고 '그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윽박지르는 투로 말했다. "편지에 농간을 부렸다고 써 놓았던가요?" 도희는 아예 내 속마음을 뒤집어놓을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이죽거렸다. "이봐, 도희! 내 편에서 화를 내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여도 시원찮을 판인데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오히려 따져들 셈이야? 왜 그렇게 돼먹지 못했어! 알려야 할 메모 사항이 있으면 내게 즉각 보고하는 게 도희의 주요업무가 아닌가? 그러고도 잘했다고 큰소리 칠 테야?" 그제서야 도희는 자신이 주제넘게 나섰다는 것을 알아채고 조금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언제나 이 모양으로 변덕이지 않은가. 문을 박차고 나가서는 채 5분도 못돼 엉망이 된 내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을 성격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못 가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있으면 집적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도희를 아예 갈아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다혈질의 처녀들에게서 나타나는 가벼운 질투심이라면 몰라도, 환자에게 보이는 진정어린 열의에조차 그녀가 심술궂은 심기를 드러낸다면 이거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도흰 내가 진한 화장을 하거나 몸매를 아슬하게 드러내 놓는 옷에 질색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안색은 숨죽인 억지 자제력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푸르게 변색될 것 같았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창녀 같은 꼴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단 말야! 내일부터 그 천박한 몸가짐을 고치든가 아님 여기 나오지도 말라구!"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희는 얼굴을 감싸쥐며 뛰쳐나갔다. 그러고서도 응어리진 감정이 걸러지지 않은 나는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잡아먹을 듯이 날뛰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무뎌지겠지라고 여기면 오산이야! 이번만은 다르다구! 알아듣겠어?"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 주둥이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가까스로 흥분의 가닥을 잡았을 때 일이 빗나기도 한참 빗나가고 있다는 착잡함이 엄습해 왔다. 대체 이게 뭔가! 반갑지도 않은 편지 한 장이 하등 쓸데없는 감정의 과잉을 초래하다니! 이날 오후에는 환자들에게 무슨 조언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나는 도희에게 정은경의 편지 건(件)을 눈치채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형사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형사는 곧 입이 싼 도희가 참새처럼 퍼뜨린 말을 듣게 될 것이고 배신감으로 생겨난 화를 삭이기 위해 병원으로 들이닥쳐 성가시게 굴지 모른다. 물론 나는 시치미를 뗄 수는 있겠지만 그럴수록 일이 꼬여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일단 증거물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쓰레기통을 뒤져 찢어진 편지 쪼가리들을 찾아낸 다음 그것들을 재떨이에 모았다. 이어 성냥불을 그어대려가다 찢어진 쪼가리 하나에서 YKMES라고 쓴 알파벳을 보았다. 아깐 별 생각없이 흘려 넘겼는데 지금 보니 조금 이상했다. 우선 이름의 이니셜이라면 알파벳이 세 자리어야 할 텐데 다섯 자리라는 것이 그랬고 앞의 YK를 은경으로 본다면 뒤에 MES는 무엇의 약자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은경이 메스를 들다'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끔찍한 상상은 편지의 마지막 쪼가리가 연기로 화했을 때 연기와 함께 내 의식에서 떠나갔다. 두통거리의 핵심은 내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을 경우 의당 형사에게 알려주는 것이 나중에 골치 거리를 더는 데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는 간단한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전화기 번호판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는 것으로 나는 그들(형사와 정은경) 사이의 갈등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깊은 마음으로부터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새삼 도희에게 들킨 것이 안타까워졌다. 하지만 일이 벌어진 이상 미적지근한 태도는 더욱 궁지에 빠져들 소지를 안고 있다. 매사에 보신을 생각하고 이기심을 접어 두면 정은경의 처지가 정말 딱하게 되었다는 동정심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리적으로 여자의 본능마저 빼앗기는 가혹한 고통을 당하면서 친언니를 죽인 혐의로 형사의 감시를 받고 있는 여인! 이 드라마틱한 여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숙명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이 여인에게는 내가 아니면 구원의 손길을 내밀 곳도 없는 것 같다. 밤을 지새우는 고민 끝에 내가 요구한 돈을 들고 나가기로 작정한 것은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으로부터 차마 매정하게 등을 돌릴 수 없었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언니의 죽음이 정은경의 불감증이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병인에 대한 돌파구가 찾아지면서 아울러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의 여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떨칠 수 없는 내 편견이자 도덕관념이 그녀에 대해 열정적인 호감을 부채질한 탓이었다. 정말, 약간은 들뜬 흥분에 압도되면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이란 이렇게 나무토막처럼 메마르고 무감각한 질(膣)의 세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은 십만 원짜리 수표로 준비했다. 빠알갛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교정의 노천강당으로 들어섰을 때 시든 낙엽들이 굴러다니는 계단식 좌석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단상의 첫계단으로부터 강당의 꼭대기까지 소리없는 텅 빈 정적이 불어오는 삭풍에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험 때라 싸돌아다니는 학생들이 극소수였으므로 나는 거의 반시간 동안 그곳에 혼자 앉아 있는 셈이었다. 알 수 없게도 정은경은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어둠이 노천강당을 감쌌고 빛이 사라지자 쌀쌀함은 한층 목덜미를 파고들어 왔다. 바람을 맞은 것에 불쾌감이 일었다기보다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떨쳐 내며 노천강당을 떠났다. 주차해 둔 곳에서 우연찮게 도희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그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느낌이었다. "선생님 아니세요? 지금 시작엔 여긴 웬일이에요?" "그, 그냥 바람 좀 쐬려구." 도희 앞에서 언제나 공격을 당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이 생겼다. "전 친구 만났다가 돌아가는 길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듯 자신의 출현을 설명한다. 나는 그저께 화를 터뜨린 것에 대해 뭔가 말을 해야 된다는 생각했으나 마음같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해고하겠다는 결심이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이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하려는 내 본심을 눈치 챈 것처럼 도흰 이렇게 요구해 왔다. "저, 맥주 한 잔 사 줘요." "운전 때문에 안돼." 사고의 순발력이 부족한 나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궁색한 핑계를 대었다. 그게 또 그녀를 끌어들이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럼 집에 가서 마시면 되잖아요. 지난번에 초대하겠다고 말하신 거 아직도 유효한 거죠? 정말 그게 좋겠네요. 어서 차에 오르세요." "집은 안돼!"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왜요?" "그, 그건 청소도 부실하고...... 하여간 안돼! 좋아, 호프집으로 가자구." 왜 나는 항상 이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없는 것일까. 사람과 맞닥뜨릴 때 이따금 나를 충동질하는 불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키지 않는 술좌석에 마주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큼 고역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도희가 떠벌여댈수록 나는 기분이 무참해졌다. 깜쪽같을 수만 있다면 도희를 죽이고 싶은 살의마저 솟아났다. 도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은 8시가 가까워서였다. 어찌 보면 도희는 쫓겨날까 봐 선수를 쳐서 화해의 술자리를 마련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짐작은 그녀의 변치 않은 옷차림을 보자 곧 수그러들었다. 나의 민감성이 피곤을 몰고 올 때 타인의 무신경한 덤덤함이 부럽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용자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내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한 태도에는 누군들 치가 떨리지 않겠는가. 빈 술병이 테이블을 여백 없이 채우고 취기가 머리 끝까지 기어올라와 의식이 마비될 때까지 퍼마셔댔다. 그러자 도희는 관심 밖으로 멀어져 가고 은경의 불감증에 대한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마침 이때 도희가 그녀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으므로 술의 힘을 얻은 나는 감정전이(Transference)--정신과 의사는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유아기의 부모상으로 만들어져 환자의 신뢰(양성전이)나 거부(음성전이)를 유발할 수 있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내가 도희를 해고하는 것은 양성전이를 보이는 환자에게 도희가 끼어들어 치료를 그르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었다. 뜻하지 않게 나의 결심을 전해들은 도희는 곧바로 호프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으나 나머지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여간해선 내뱉기 어려운 선고를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를 찾은 나로서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술집에서 나오는 그 즉시 도희는 썰렁한 인사말을 남기고는 총총 사라졌다. 나는 취기를 견디지 못해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들척지근한 열기를 토해 냈는데, 다음날 아침 골이 땡기는 숙취에서 깨어났을 때 어떻게 해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 불청객 인동하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어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으로 봤던 도희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아 보였다. 내가 해고를 하겠다고 말한 것이 그녀에게는 취중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이 젊은 아가씨의 심장은 생리적으로 든든해서 웬만한 현실의 고충 앞에서는 끄덕도 하지 않는 체질인가. 그녀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아는 사람을 통해 새 경리사원을 부탁해 두었다. 이번엔 품행이 방정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지난 밤에 어디서 다쳤는지 목 부위의 살갗이 찢어진 것을 발견하고 나는 병원으로 나섰다. 도희에게 밴드나 반창고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었으나, 쓸모없게 된 십만 원권 자기앞수표 열 장을 통장에 도로 넣어 두기 위해 겸사겸사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12시가 넘은 은행창구는 반쯤 닫혀 있었기에 열린 창구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을 만큼 북적댔다. 나는 기다리기가 싫어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내친 걸음이라 길게 이어진 줄 끝에 가 섰다. 한동안 무료하게 서 있노라니까 곱상하게 생겨먹은 여은행원 하나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쟁반에 받쳐들고 일일이 고객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한 잔씩 돌리고 있을 때였다. "돌아다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얘기해요. 어제 나가지 못한 건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형사의 끄나풀이 길목을 지키고 있지 뭐예요. 제가 곽 선생님과 약속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노천강당 입구의 은행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더라구요." 라고 말해 왔다. "나는 아무도 못 봤는데." 정은경이라는 확신이 서자 나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에게 들킬 만큼 어리숙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전문가들이에요. 얕봐선 큰코 다쳐요." "그들이 우리가 만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선생님을 미행했을 거예요." "형사들은 내가 은경 양의 편지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는데두?" "그야 알 수 없죠. 워낙 정보에 민감한 사람들이니까요. 혹시 제게서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눈치 채이지 않으셨나요?" "그, 그럼 도희가......" "짚이는 데가 있어요?" "은경 양이 치료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날 형사가 찾아왔었소." "그건 짐작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그 형사가 우리 경리사원을 포섭해 내 신변을 감시하라고 말한 게 아닌가 싶소." "도희라는 여자 혹시 요란한 화장을 한 아가씨 아녜요?" "그렇소, 안 그래도 그 아가씨를 해고하려던 참인데......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쩔 셈이오?" "잠깐만요. 우리 어디 조용한 데로 가요." 나는 그녀가 소매를 잡아끄는대로 따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층계참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빈 공간이 있어 우리는 창가로 자리를 잡았다. "돈부터 주시겠어요?" 내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자 빼앗듯 그것을 받아 은경은 누가 볼세라 재빨리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늦어도 2주일 안에는 꼭 갚겠어요. 이렇게 도움을 주시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선생님은 제가 왜 이러나 의아하실 거예요. 상세한 건 ......" 거기서 말을 잃은 은경의 안색이 침울하게 굳어져 갔다. 나는 그녀의 주저하는 눈빛을 보았지만 꾹 참았던 것을 토하듯 이렇게 말했다. "찾아온 형사한테 듣기로는 친언니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다구요?" "형사가 그런 말까지 해요?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그건 거짓이에요! 저를 파멸시키려는 비열한 수작이라구요! 그자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상관에게 받았던 모욕을 제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예요. 자신도 인간인 한 수사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약점을 거부하고 범인이 저라고 끝까지 믿고 싶어하는 거죠. 설마 선생님도 그 따위 올가미 같은 얘기를 신뢰하는 건 아니겠죠?" "형사도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소. 허나 결백하다면 쫓겨 다닐 필요가 없잖소." "하지만 아니라는 증거 또한 불충분해요. 언니와 사이가 나빴던 건 사실이구요. 전 정말 이러다가 미칠 것만 같아요......" 은경은 시선을 창 밖의 먼 곳에 두고 있었는데 이슬이 맺힌 두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연약한 모습을 훔쳐보던 나는 동정심에 이끌렸으나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아무 판단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참, 혹시 제 남자 친구가 병원에 들이닥치지 않았나요?" 은경의 물음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앞으로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그 친구 제가 사라진 다음 수소문을 해서 최근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닌 사실을 지금쯤 알아냈을 거예요. 난폭한 면이 있는 친구니까 무슨 험악한 짓을 할지 몰라요. 정말 죄송해요. 행여 찾아가 무례하게 굴더라도 절 봐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잡지사에 다닌다는 남자 친구 말이오?" "그래요. 성질은 급하지만 머리가 담벼락은 아니니까 잘 구슬려 보세요." "애인이 많아 항상 바쁘다던 친구가 찾아올까요?" "그래도 자신이 걷어차기 전까지는 끝까지 상대를 함부로 방치하지는 않을 인물이에요." "그럼 내가 뭐라고 하면 되겠소?" "그건 선생님 편한대로 하세요. 거짓말이 싫으시면 사실대로 말해도 무방하구요." 그녀는 내게 시간을 물은 다음 다시 말했다. "한곳에 오래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선생님,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나도 한 마디 합시다. 다름이 아니라...... 그러니까 저, 그렇지 난......" 나는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도로 삼키며 망설였다. "왜 그러시는가요?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그녀의 표정에서 괜찮다는 빛을 읽고 나서야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말하면 야속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솔직히 형사사건은 관심 밖이오. 그렇다고 은경 양이 아무렇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오. 다만, 내가 어제 K대의 노천강당으로 나갔던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은경 양의 불감증을 치료하고 싶어서였소. '이런 판국에 치료는 무슨?' 이라고 황당해 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가 심사숙고한 결과인데 불감증이 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오?" "역시, 선생님은...... 하지만 그 문젠 차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겠어요. 지금 당장은......" "아, 알았소. 어서 가 보시오.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 같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정은경은 베이지색 바바리 자락을 휘날리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조금 있자 은행을 빠져 나온 그녀가 거리를 가로질러 택시 정류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미행이 두려운 듯 간간이 뒤를 힐끗거리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도 은행을 나섰다. 내 심정은 착잡했다. 아울러 가볍게 범죄에 가담한 듯한 느낌이 들어 지나치는 사람들의 행색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나 자신도 뒤를 밟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좀살스런 과민반응이 우스웠다. 점심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병원 대기실은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의처증에 걸린 남편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아 심장이 약해진 아주머니에게 목례를 하고 내 방에 들어섰을 때 도희가 뒤따라 들어왔다. "환자는 10분 후부터 들여보내." 나는 꼴보기 싫은 그녀가 어서 꺼져 주기를 바라며 말했다. "효숙이 언니 조퇴했어요." "내 허락도 없이?" "집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봐요. 아침부터 시무룩해져서 전화통만 들여다보더니 1시간 전쯤 뛰쳐나갔어요." "아니 대체 요새 왜들 이러는 거야?" 나는 갑자기 도희가 형사의 끄나풀 노릇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사실이 생각나 소리쳤다. "제가 뭘 어쨌게요?" 도희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이 눈을 똑바로 치켜뜨며 대꾸해 왔다. 어차피 해고될텐제 니까짓 거한테 꿇릴 게 뭐가 있겠느냐는 거칠은 태도로 나오는 듯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나가 봐!" 나는 피로를 느끼며 언쟁을 피하고 싶어졌다. 아닌게아니라 어제의 과음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데다 정은경과의 만남이 정신적 피곤을 몰고 온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목을 등받이에 기댔으나 뭔지 모르게 머리 속이 휭하게 비워져 가는 듯한 막막함이 엄습해 왔다. 정확히 10분이 지나자 도희가 환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초점을 잃은 눈빛의 까무잡잡한 17세 가량의 소녀 뒤에 누가 봐도 쉽게 모녀로 짐작할 수 있는 40대 여자가 서 있었다. 도희가 나갈 때 정은경을 만나는 바람에 깜박 잊었던 밴드를 사오라고 일렀다. 소녀의 엄마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40대 여자는 딸이 성폭행을 당한 후 가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거였다. 요즘 들어 물질적 욕구의 과잉폭발이 빚어낸 인간성 파괴의 결과였다. 그것은 순결한 정신성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에 속했다. 격분이 나를 휘몰아쳤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를 간직한 소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기껏 안정을 취하며 과거를 떨쳐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이 얼마나 가당찮은 충고인가. 내가 그런 일을 당했더라도 소름끼치는 기억을 말끔히 씻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이어지는 환자들은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구면이라 대화가 한결 수월했으나 나는 눈꺼풀이 처질 만큼 지쳐 있었으므로 의식이 몽롱한 게 상담이 반수면 상태에서 진행됐다. 마침내 마지막 환자를 물리치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 밖에서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도희가 누군가를 다그치며 몰아세우는 음성에 이어 문이 덜컥 열리며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나는 한눈에 그 사내가 정은경의 애인인 인동하임을 알아보았다. 소매를 붙들고 만류하는 도희에게 괜찮으니 나가라고 이른 다음 그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게 자리를 권하자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대뜸 하는 소리가 이랬다. "은경이를 어디로 빼돌린 거요?" "자, 진정하시고 거기 좀 앉으세요." 나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에서 조금도 당황해하거나 흐트러진 틈을 보이지 않자 처음의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수그러들며, "좋아요. 앉긴 하겠수다. 하지만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면 그땐......" 하고 위협해 왔다. 사실, 정은경의 적절한 예비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겁을 집어 먹고 몹시 떨었을 것 같았다. 사내의 체구가 워낙 만만치 않아 보이는 데다 쏘아보는 눈매가 강인한 운동선수에게서 풍겨나오는 인상처럼 매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내 의도대로 상황을 연출해 가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난 지금 막 커피를 마실 참이었는데 한 잔 드시겠습니까?" 내가 흥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뜸을 들이자 사내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발정기의 들소처럼 치받을 듯이 의자를 들썩거렸다. "차나 마시며 한가하게 노닥거릴라고 여길 찾아온 줄 아슈? 성질 돋굴 생각 말고 어서 말해 보란 말이오! 은경이는 어딨는 거요?" "이봐요. 인동하 씨! 다짜고짜 윽박지른다고 없는 사람을 어디서 찾아옵니까? 그리고 대체 내가 그 아가씨를 감춰 뒀다고 믿는 이유가 뭡니까? 나 워언 어이가 없어서......" 나도 고분고분할 수만은 없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사내는 움찔했다. 큰소리를 친 것도 효과가 있었지만 사내가 크게 놀란 것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잠깐이더니 양복 저고리의 안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어 부피를 줄인 종이 뭉치를 꺼내 내 책상 위로 던졌다.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도 부인할 거요?" "그게 뭡니까?" 나는 더러운 것을 대하듯 관망하며 물었다. "왜, 당신 손으로 직접 펴 보기가 겁이 나요? 은경이의 일기장에서 찢어온 거요. 읽어 보면 내가 왜 당신을 의심하나 이해가 갈 거요. 좋시다. 내 당신에게도 충분히 해명할 기회를 드리지. 그걸 다 읽고 나서도 그 얄팍한 입술을 제멋대로 놀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봅시다!" 종이는 대학노트 세 장을 뭉친 것이었는데 각각 날짜가 다른 짤막한 일기였다. x월 x일 로이드 정신병원에 가기 전엔 무척 망설였는데 다녀오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속에서 끙끙 앓았던 말을 내뱉으니 속이 후련하다.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빠져 나간 듯이 홀가분하고 가뿐하다. 곽 선생님은 아빠 같은 느낌이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하고...... 간간이 답답하기 곤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나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이뤄진 모처럼의 기회가 해묵은 내 병을 완전히 고쳐 주었으면 한다. x월 x일 두 번째 병원에 다녀왔다. 친밀감이 내 기분을 부드럽게 했다.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는 아빠를 떠올린다. 나를 어루만져 주시던 그 따뜻한 손길...... 나는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두려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떨림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나를 감싼다. 아아, 나는 영원히 카우치에 잠들어 선생님의 환자로 남고 싶다. x월 x일 나의 성도덕은 푸딩이나 젤리처럼 물러빠진 것일까? 성 얘기만 나오면 나는 선생님의 엄한 눈초리 앞에서 초라하게 움츠러들고 만다. 성자의 권위를 얻은 심판관에게 벌거숭이의 창녀가 죄가의 벌을 초조함 속에서 기다리는 비참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상대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을 때 신경을 곤두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찔해지는 관자놀이는 그분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의 육체적 표현이 아닐런지!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그냥 덤덤했다. 가벼운 양성전이 현상을 드러낸 것만으로 마치 내가 자기의 소중한 애인을 가로챈 듯 펄쩍 뛰는 것이 웃지 못할 코미디같이 느껴졌다. "그래, 이 일기가 뭐가 어쨌다는 거요?]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따져들 듯 말했다. "정말 대단한 양반이시군! 거기에 쓰여진 표현을 보고도 잡아뗄 셈이오! 대체 치료를 하는 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여자가 황홀감을 느낀단 말이오!" 인동하는 지지 않고 이죽거렸다.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무슨 짓이라뇨? 내가 불량스런 치한이라도 되는 투로 빈정대는 건 나도 못 참소!"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어서 당장 나가시오! 그 따위로 무례하게 굴 양이면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여차하면 경찰을 부를 테니까!" "그런다고 내가 떨 줄 아쇼? 이거 왜 이래? 점잖은 체면이 손상될까 봐 지레 발뺌할 모양인데 난 뭐 뒷짐지고 먼 산이나 바라볼 줄 아쇼?" 인동하도 덩달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수화기로 손을 가져갔다. 놈의 두툼한 손이 재빨리 덮쳐 왔다. 내가 노려보자 경멸이 담긴 녀석의 표정에 조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좋시다. 이러면 피차 이득될 게 없으니 한 발씩 물러서는 게 어떻겠소? 내 입을 함부로 놀린 건 사과 드리리다. 하지만 은경과의 관계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려는 건 용납 못하오." 이렇게 타협안을 제시한 동하를 나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각이 진 이마 위로 붓총처럼 숱이 풍성한 눈썹이 제법 쾌남다운 인상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 하나는 정은경의 말대로 여자깨나 울렸을 것같이 수려했다. 비록 3류라고는 하지만 잡지사 편집인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그럽시다." 내 말이 떨어지자 동하는 손을 놓았다. "차 한 잔 들겠소?" 이제는 나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동하가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나는 인터폰을 통해 커피 두 잔을 가져오라고 도희에게 일렀다. 동하가 담배를 권해 왔으므로 우리는 커피가 들어올 때까지 입을 다문 채 담배를 피우기만 했다. 도희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서 커피를 내려놓았다. 내 잔 옆에는 대일밴드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퇴근을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인동하 씨는 은경 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도희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그녀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물론 깊은 사이라는 건 알고 있소. 문젠 은경 양이 왜 이 병원에 찾아왔는지 아느냐 하는 것이오." "매사에 답답하고 의욕이 없다고 했소." "그 이상은?" "글쎄요, 뭐랄까...... 피학적인 기질 때문에 번민하는 것 같았소." 뜻밖이었다. 호색한에게서 '피학적인 기질' 이라는 어휘가 튀어 나온 것은 의외로 이 친구는 지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던가요?" "그런 적은 없소. 다만 나는 가까이서 생활하다 보니 그녀에겐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느꼈던 거요.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왠지 과거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 같았소." "그 과거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요?" "몰라요. 헌데 한 가지 물읍시다. 지금 이런 물음들이 당신이 내게 해 주어야 할 대답과 관계가 있는 거요?" "물론이오. 웬만하면 이런 말은 안하려 했는데...... 은경 양은 불감증이오." "불감증이라뇨?" 동하는 너무나 놀라운 얘기라 얼른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로서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둘 사이의 애정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충격요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사내라 별로 주저하지 않고 말한 것이었다. 아울러 진실은 밝혀도 무방하다는 정은경의 언질에서도 힘을 얻었다. "말 그대로요. 잠자리에서 성적 희열을 느낄 수 없다는 뜻이오." "으하하하하......" 동하는 호탕하게 웃어젖힌 후 말했다. "근자에 이런 고단수의 농짓거리는 처음이야. 당신 정말 날 웃겼어! 은경이가 불감증이라구?" 동하는 또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나는 그가 호흡을 가다듬기를 기다렸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은경 양에 대해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요. 당신이란 인간이 여자를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소피아 로렌처럼 엉덩이가 크거나 돌리 파튼처럼 농구공만한 젖가슴을 가졌는가 하는 즉물적인 요소겠지. 그런 풍만한 육체를 하룻밤 소유하게 되면 그 여자를 다 알았다고 자부심을 느끼겠지. 어디 더 웃어 보시지! 그러고도 은경 양의 애인이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겠소?" "이봐, 의사양반! 더 이상 못 참겠으니까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 그 여잔 나와 수십 번이나 잠자리를 같이 했어. 내가 얼간이로 보이나? 그 여자가 까무러칠 정도로 감창을 부르짖더란 말을 내 입에 담아야 믿어 줄 거냐구!" "여자는 누구나 위대한 배우의 소질을 타고난다는 말이 있지. 안됐지만 당신이 철저히 속은 거요. 당신에게 불감증이 알려지면 그 즉시 헤어질 것을 각오해야 했을 테니까. 한 가지 더 말할까요. 그만큼 은경 양은 당신을 곁에 두고 싶었던 거요." 그제서야 동하는 대들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의혹을 전혀 떨쳐 내지 못한 그의 얼굴 사이로 당황해하는 조짐이 조금씩 드러났다. 나는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 갔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다 마실 동안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순간 충격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은경 양이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은 세 번이었소. 우린 그녀의 불감증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아직 그 원인을 규명해 내진 못한 상태요. 치료기간이 워낙 짧은 데다 그녀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폐쇄하려는 욕구에서 온전하게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설상가상으로......." 나는 그녀가 형사에게 쫓기고 있다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 머뭇거렸다. "설상가상으로 뭐가 어떻게 됐단 말이오?" 동하는 상당히 진지해져 있었다. "은경 양의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오빠와 언니가 하나, 부모님은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소." "언니가 죽었다는 얘기는?" "들었소."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 "그건 모르겠소." "은경 양은 지금 도피중이오." 나는 인동하가 얼떨떨해하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 약간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금방 무시당했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은경이가 뭐가 무서워서 도망을 다닌단 말이오?"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차근히 들어 봐요. 경찰은 언니를 죽인 범인이 은경 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오. 물론 은경 양은 내게 그런 일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어쨌든 경찰의 입장은 다른 것 같았소. 여기까지 수사망을 펼칠 정도였으니까." "경찰이 혐의를 두고 있단 말이오?" "그렇다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하의 안색을 살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으, 은경인 쥐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인데......" 동하는 입으로는 부인하고 있었으나 간단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은경 양은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나서서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은 동하 씨밖에 없어요." "무슨 소리요? 나한텐 전화 한 통화 없었는데." "형사들이 동하 씨의 신변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요." "나를?" "은경 양이 내게 돈 백만 원을 빌려가면서 그렇게 말했었소."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아 나는 그에게 정은경이 보내 온 편지로부터 오늘 은행에서 만난 일까지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소." 듣고 난 동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믿어야 하오. 당신이 은경 양을 사랑한다면 이런 때야말로 애정을 과시할 다시 없는 기회일 수도 있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가 당하는 괴로움을 덜어 주어야 하오." "어, 어떻게 말입니까?" "글쎄요. 유감스럽지만 나로서는 당장은 도와 주라는 말밖에 하기가 어렵군요. 지금은 나도 은경 양의 거처를 모르고 있소. 꾸어간 돈을 늦어도 2주 안에는 갚겠다고 했으니 그때 연락이 오면 즉시 알려주겠소." 동하는 한참을 괴롭게 숙고하는 표정이었다가 갑자기 의문스럽다는듯이 물어 왔다. "언니가 죽은 지 꽤 오래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형사들이 은경일 잡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소?" "바로 그거요. 잘 지적해 주셨어요. 경찰은 심증만 갖고 있지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한 것 같았소. 그런 의미에서 문제는 오히려 은경 양 쪽에 있는 것 같았소. 뭐랄까, 딱 부러지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녀가 언니를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언니의 죽음이 한층 심리적 괴로움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소. 그러다 보니 당당하게 형사들과 맞서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을 일을 자꾸 움츠러들어 그르치는 것 같았소." "내가 담당 형사와 담판을 지으면 어떻겠소?" 동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태도였다. 아니나다를까. "그게 쉽사리 먹혀들까요?" 하고 반문하자 금세 결심을 바꾸며 자위했다. "하긴 남이 설치고 나선다고 해결될 거였으면 일이 이런 궁지에까지 이르지도 않았겠지." 나는 이 친구가 곧 구둣발에 채인 똥개처럼 꽁무니를 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은경이 언니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명예의 손상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불감증인 여자에게 호색한인 그가 관심을 가질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서로간에 궁금증이 시들해지자 마침내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거처를 가르쳐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을 나설 때쯤 내가, "계신 곳을 알려주셔야죠?" 라고 물어 봤을 때야 겨우 잡지사 전화번호를 마지못해 알려 줄 뿐이었다. 혼자가 되자 나는 대일밴드를 들고 복도의 화장실로 갔다. 목의 상처는 예상했던 것보다 깊어 보였다. 목젖의 우측으로부터 쇄골 부위까지 날카로운 못으로 긁어댄 것처럼 시뻘건 줄이 나 있었는데, 상처를 제때에 돌보지 않아 곪을 조짐이 보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띠처럼 부풀어오는 그곳을 쥐어짤까 하다가 대일밴드 두 개를 겹쳐 붙여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밖은 어두워 있었다. 나는 서둘러 양복을 걸치고 병원을 나섰다. 저녁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별로 식욕이 당기지 않아 분식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말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스모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추수를 시작한 벼논을 가로지르는 국도를 외로이 달리는 기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악셀을 힘주어 밟을 때마다 세속의 불결을 떨쳐 버리고 시원하고 거대한 자연의 품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독이 유쾌해졌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이 누리는 기쁨처럼 느껴졌다. 열어 둔 차창을 통해 들이치는 바람을 타고 유현(幽玄)한 그윽함이 전해져 오는 것은 고독한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경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톨이가 되어 모든 것을 독점해 버린 쾌활함, 오직 나의 끝모를 상상력과 방해받지 않을 떠들썩한 목소리, 절대적인 관점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유열감이 나를 전율케 했다. 나는 기어를 5단으로 올리며 악셀을 찍어 눌렀다. 이제 차체가 붕붕 떠서 날아가는 것처럼 짜릿한 통쾌감이 덮쳐 왔다. 가로수들이 쌩 하는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날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과악우웅혀억! 과악우웅혀억! 나는 그 허무한 이름을 외치며 벼랑으로 차를 몰아가 산산조각이 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자기연민의 엑스터시는 별장이 가까워져 차의 속도가 떨어졌을 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어 느닷없이 이번엔 고독이 두려워졌다. 뭐랄까, 나는 불안정한 본성의 밀실에 갇힌 것처럼 초조해졌다. 집안으로 들어와서도 그런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양주에 얼음을 섞어 넣어 마셔댔지만 가위에 눌린 직후 잠에서 깨어나 얼떨떨하게 정신을 차린 것처럼 가슴에는 두려움이 잠재해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와서 나를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정은경이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정이 넘도록 조마조마하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게 사랑일까?) 나는 제과점 앞에서 헤어진 여학생을 못 잊어 책상머리 맡에 앉아 고민하는 여드름쟁이 소년처럼 자문해 보았다.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한 번도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어쩐지 그것은 기분 잡치는 욕설처럼 끔찍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고 마는 것이었다. 11. 효진의 실종 효숙은 이튿날 출근하지 않았다. 도희는 그녀대로 시무룩해져 있었다. 나는 도희를 불러들여 말했다. "효숙이는 어떻게 된 거야?" "전화를 받지 않아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저도 모르겠어요."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우울한 날이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고 약속된 환자들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왠지 모든 게 침체되어 타성의 늪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뒤숭숭하고 지리했다. 12시가 가까워졌을 때 친구로부터 쓸 만한 경리사원을 구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1시까지 보내달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예상보다 조금은 일찍 닥친 일이라 도희에게 해고를 통보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결국에는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 막 불러들일 참이었는데, 도희가 먼저 창백한 안색이 되어 가지고 노크도 하지 않고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효숙이 언니와 연락이 됐어요! 집안에 큰 문제가 생겼나 봐요! 그게 그러니까......" 도희는 침착을 잃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차근히 얘기해 봐." "여동생이 행방불명됐대나 봐요." "효진이 말야?" "그래요. 요 앞 K대학에 다니는 여대생 말이에요." "친구들이랑 어디 산에라도 놀러간 게지." "지금 언니 집에 가 볼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죠?" 도희는 내 의견을 묵살하며 말했다. "환자들은 어떡하구?" "지금은 없어요." "그래도 오후에는 꽤 들이닥칠 텐데?"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다녀오면 되잖아요."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1시간 안에 갔다온다는 것은 무리였다. 나 혼자서 환자들을 받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2시 환자 아니 3시 환자까지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취소시켜." "선생님은요?" "나?" "같이 가셔요. 효숙이 언닌 대구에 친척이나 친구들이 없잖아요. 이럴 때 저희가 아니면 누가 위로를 해 주겠어요?" 나는 그녀와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았었는데 도희가 조르다시피 나오니까 발뺌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즉시 병원 문을 걸어 잠그고 내 차로 이동했다. 걸어가도 30분 이상은 안 걸릴 거리지만 그곳에서 머물 시간을 계산해 서두른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파트 문은 열려 있었고 효숙은 거실의 소파에 엎드려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도희가 뒤에서 어깨를 감싸쥐며 위로를 하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차 한 잔 드실래요?" 그러면서 일어나려 하자 도희가 만류했다. "이런 판국에 차는 무슨? 언니, 그대로 있어요." "그래 우리한테 신경쓸 거 없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말했다. "그저께 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하루쯤 친구들과 밤을 새운 줄 알았어요. 헌데 어제 아침에도 연락이 없길래 조바심이 나 조퇴를 했던 거예요.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무슨 끔찍한 사고라고 당한 게 틀림없어요." 효숙은 콧마루가 시큰거리는지 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냈다. "그렇게까지 비관할 거 없어. 발랄하게 돌아다닐 젊은 때이니까 또래들과 어울려 어디 산막(山幕)이나 가을 바다라도 구경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정말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이렇게 연락조차 없이 외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진정하라구. 이쪽에선 피를 말리듯이 애를 태우고 있는데 여동생은 가볍게 여기는지도 모르구.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이런 일쯤은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는 독립심과 자유를 만끽하려는 치기에 사로잡혀 그럴 수도 있구."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며칠 전부터 시험기간이거든요. 평소라면 몰라도 시험기간에 누가 여행을 떠나겠어요?" 이쯤 되자 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러자 도희가 나섰다. "언니, 신고는 했어?" "경찰서에 방금 다녀오는 길이야." "뭐래?" "빨리 좀 찾아 달라고 사정사정 했는데 밀린 업무가 많은지 알았다고만 했어." "내가 좀 나서 볼까?" "네가 어떻게?" "그 쪽 방면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 도희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그녀가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은 신승환 형사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네가 잘 좀 말해 줘. 실종신고는 자주 들어오는 편이라 형사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줄 것 같지 않더라. 지금 전화 걸어 주겠니?" "당장?" 도희는 다시 한 번 불안한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그랬으면 해.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잖아. 전화는 안방에 있어 이리 와 봐." 효숙은 힘이 나는지 주저하는 도희를 잡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희는 내가 의식되는 듯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끔거렸다. 채 1분도 안돼 효숙이가 먼저 나왔다. "전화는 했어?" 내가 궁금해져 물었다. "지금 하고 있어요. 나 보고 잠깐만 나가 있으래요." "왜?" "모르겠어요." 나는 짐작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했다. 도희는 신 형사와의 대화가 효숙의 입을 통해 내 귀에 들어올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도희는 5분 후에 활짝 핀 얼굴을 해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어떻게 됐어?" 효숙이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곧 이리로 오겠대. 와서 상세한 것을 들어봐야겠대." "어쩜. 그렇게 고마울 데가. 정말 고맙다 얘." 효숙은 도희를 끌어안고 한시름 놓는 것 같았다. 과민한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이런 곤혹스런 일에는 도희보다는 휠씬 세상 경험이 많은 내가 나서서 도움을 줬어야 한다는 계면쩍음이, 이제 내가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는데도 선뜻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아울러 오기 싫은 곳에 마지못해 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얼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도희가 경황이 있을 리 없는 효숙이 대신 차를 내왔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마셨다. 효숙은 도희와 내가 이렇게 찾아와 자리에 마주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서울 집에는 연락했어?" 도희가 녹차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아니, 못했어. 이런 일을 무슨 낯으로 알려? 부모님은 나를 믿고 효진이를 이곳 대학까지 보내신 건데 내가 간수를 못해 행방불명이 됐다는 말을 어떻게 해?" 효숙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해 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순 없잖아?" "나, 어떡하면 좋아!" 효숙이가 얼굴을 감싸쥐며 울음을 터뜨리자 도희는 그녀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이제보니 도희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엇비슷한 또래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여유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효숙이가 울먹이는 동안 시선을 거실의 바람벽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이 담긴 액자에 두었다. 4명의 가족은 사진사의 김치 하는 요구에 따라 하나같이 작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서로 친근하게 어깨를 맞댄 분위기에는 그런대로 어울려 보였다. 효숙, 효진 자매는 뒷열에 서서 앞열에 앉아 다소곳한 포즈를 취한 부모의 어깨 위에 다정스레 손을 얹어 놓고 있었다. 흔히 소도시나 읍면의 사진관에 들르면 진열장 속에서 보게 되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가족간에 교감되는 행복이 광택 좋은 옥구슬처럼 화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모는 항상 가정의 화목을 위해 헌신을 다해 온 인상 그대로였고 효진의 야생마 같은 명랑함과 장난기 섞인 표정, 효숙의 이지적인 안정감(나는 이제 이것을 의심하고 있지만)은 사랑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흡인력이 있어 보였다. 나는 한 자궁에서 태어난 혈통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한 친화력을 끊임없이 부러워해 왔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눈앞의 사진처럼 부권의 절제된 영향력이 형평을 유지하는 균제의 미 같은 것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어야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망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의 바위같이 짓눌려 오는 힘을 두려워했었다. 흰 여백이 하나도 없는 소설책 같은 빡빡함--내가 고독을 사랑하는 체한다면 그건 그런 중압감에서 탈피하려는 의도적인 허식의 그림자인지도....... 내 사념을 일깨운 것은 형사였다. 짐작과는 달리 신승환 형사는 아니었다. 작은 체구에 호리호리해 경마의 기수 같은 인상의 형사는 동작 또한 민첩해 보였다. 형식적인 수인사를 서둘러 마치더니 효숙이를 마주앉혀 놓고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효진 양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습니까?" "그저께 아침 출근할 때였어요." 효숙은 긴장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날 밤 이후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긴데...... 학교 친구들은 만나 보셨습니까?" 형사는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온 것 같았다. "네, 어제 오후에 학교에 나가 과사무실에 들러 얘기를 들어 봤었어요. 중간시험 기간 중인데 그날 동생은 시험이 없었나 봐요. 도서관에서 오후 4~5시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봤다는 학생의 얘기로는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학교에서 마주치지 못했다더군요." "좋습니다. 그 점은 학교에서 탐문수사를 해 보면 더 정확히 드러날 문제고...... 학교에서 늘상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을텐데요?" "글쎄요. 애가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집에 데려오는 친구들은 없었어요. 사귀는 남자 친구가 하나 있는 것 같던데 이름은 모르겠구요." 효숙은 기억을 억지로라도 일깨워 동생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제공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으나 형사는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얘기는 효진의 주변생활로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내가 듣기에도 별반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시무룩해진 효숙의 말투 사이로 간간히 형사의 가벼운 나무람이 끼어들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 잠시 베란다로 자리를 피했다. 거푸 두 대를 피우고 났을 때 현관 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곧이어 들이닥친 청년은 일전에 효숙이와 함께 동생을 찾으러 K대의 교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음악대 근처의 숲에서 만났던 대학생이었다. 청년은 막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 같았다. "효진이가 행방불명 되었다면서요?" 그는 효숙이를 보자마자 비명을 내지르듯 말했다. "학생은 누군가?" 이렇게 물은 것은 형사였다. "전 효진이 학교 선뱁니다." "구체적으로 신분을 말해 보게!" "K대학 국문과 3학년이고 이름은 은종철, 효진이와는 교내 문학서클에서 만난 사이입니다." 청년은 형사의 위압적인 다그침에 순순히 대꾸했다. "효진 양을 마지막 본 게 언제지?" "그저께 점심 때 교문 앞 오부자 분식집에서 식사를 같이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전 오후에 스터디그룹 애들과 동기 자취방에서 공부를 했었구요. 헤어질 때 효진이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효진 양에게서 수상하다거나 그와 유사한 특별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나?" "아뇨, 평소처럼 발랄하고 수다스러웠어요." "효진 양이 어디 가 있을 만한 데가 없을까?" "글쎄요. 과동기들과 함께 모여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전화 한 통화 없이 이틀씩 집을 비우고서 말이야?" 머쓱해진 청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 지금 시간 좀 낼 수 있지?" "시험공부를 해야 하지만 효진이를 찾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아암, 그래야지. 나랑 학교로 가 보자구!" 형사는 청년을 앞세워 아파트를 나갔다. 효숙은 처음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원기를 되찾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도 가 봐야겠군. 예약이 안된 일반환자들을 돌보아야 할 테니 말이야." "선생님, 이렇게 찾아와 위로를 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효숙은 현관까지 따라나오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군. 도희야말로 오늘 실력발휘를 한 공로자지." 나는 부끄러움을 타는 도희를 흘낏 바라본 후 다시 말했다. "효숙인 당분간 집에서 쉬라구. 내 병결(病缺)로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구. 곧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도흰 좀더 있다가 오도록 해. 아니 오늘은 여기 남아서 효숙이와 함께 있는 게 좋겠어." "병원은요?" 빨간색 하이힐을 신던 도희가 반색과 걱정이 반반 뒤섞인 표정으로 물어 왔다. "나 혼자 있어도 돼."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착잡해져 있었다. 효진의 실종도 실종이었지만 나를 둘러싼 일들이 뭔지 모르게 불안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1시에 경리사원과 만날 약속을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시계를 보자 3시 10분 전이었다. 진료실로 들어오는 즉시 부탁을 해 두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미안하네. 갑작스럽게 볼일이 닥쳐서 말이야. 내가 깜박했어." "그래도 그럴 수가 있는가? 전화 한 통화쯤 해 주었으면 미스 양이 헛걸음을 하지 않았을 거 아냐." 친구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니까. 내 술 한잔 사겠네. 그건 그렇고 그 아가씨한테 내일 한 번 더 와 달라고 전해 주게.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꼭 지킬 테니까." "늦었어. 마침 다른 일자리가 나서 그리로 보냈네." "뭐라구? 아니 그 틈을 못 참아서 다른 데로 보냈단 말인가?" "하다 보니 사정이 그렇게 됐네. 자네 급한 사정은 나도 아니까 곧 새 사람이 구해지는 대로 보냄세. 그럼 나 들어가네." 나는 스포츠 신문에 실리는 오늘의 운세라도 보고 싶은 무참한 기분이었다.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이 뒤죽박죽인 하루였다. 환자 서너 명이 찾아왔으나 급한 일을 내세워 돌려보낸 후 병원 문을 닫아 걸었다.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디서부터 꼬여 들어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가닥이 잡힐 일이 아니었다. 원래 세상일이란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6시쯤 전화가 걸려 왔다. 내심 정은경이었으면 했는데, 대화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나 신승환 형사요. 정은경에게서 연락온 거 없습니까?" "없었소." 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오늘 정오부터 전화를 받지 않던데 어디 가셨더랬습니까?" "내가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오?" "아니,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불쾌하게 들리셨다면 사과 드립니다. 정은경과 접촉이 되면 내게 연락해 주세요. 내가 드린 명함 잃어버리지 않으셨죠?" "다른 용건이 없으면 끊겠소." 나는 던지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별안간 두통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게보린을 찾아 먹은 후 서가에서 국제기드온 협회에서 보내 온 신약전서를 빼내 책상 위에 펼쳐 들었다.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로마서 7장에 눈이 머물렀다.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12. 불안한 고독 인체에는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를 놓고 볼 때 깨어난 지 1시간 후부터 정신이 가장 맑다가 젖산이 피에 축적되는 오후 무렵 피곤을 느끼기 시작해 취침 직전까지 눈꺼풀을 밀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된다. 그 주기를 하루가 아니라 한 달, 일 년, 아니 전 일생으로 넓혀 나가 보면 지금 나 자신 인생이 상승곡선을 긋는 것인지 하강곡선을 긋는 것인지가 밝혀진다. 37세, 독신, 정신과 개업의, 체중 74킬로, 키 179센티의 건강한 체격, 많진 않지만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재산...... 이 정도면 내 삶은 상승곡선을 타서 이미 절정에 도달했어야 하지 않을까. 상식의 잣대로 견주어 보면 나는 확실히 상류층에 속한다. 그러니 행복의 양도 그만큼 쌓여 있어야 했다. 내가 매사에 우월감을 느끼며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처해 온 것은 의대 시절부터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형식적인 관문을 통과한 것에 불과했지만, 의대를 선호하는 기성세대들의 극성에 힘을 입어, 그리고 하루 겨우 3시간의 수면을 취하며 보낸 고3 때의 뼈를 깎는 고통의 보상심리도 작용해 나는 의대생이라는 배지가 영원히 환희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사회적인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객관적인 소유물(돈, 미모의 여자, 인기 직업)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좀더 개성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의식해 왔다. 그것은 남과의 구별을 통해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획득하려는 발버둥으로 내가 주위 사람들과의 단절(공간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가치적인 면도 포함된다)을 감행함으로써 알게 된 것은 결국 나 자신의 폐쇄적인 성격 뿐이었다. 고백하건데, 마흔이 가까워 오도록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아내를 발판으로 지금보다 넓은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친구들이 언제나 회색계통의 옷을 입는 것이 싫어 새빨간 셔츠를 입은 나는 드디어 나만의 개성을 찾았다고 확신했지만 권위가 있는 누군가(그것은 합리적인 학문성일 수도 있다)로부터 오래 전에 발아된 불치병을 지적당한 것과 같았다.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나듯이 대구로 내려온 것은 그런 의미에서 도피행각에 다름아닌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런지 친숙해지는 것을 두려워했으니까. 동남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산으로 막힌 을씨년스런 별장을 그 편하다는 아파트 대신 택한 것도 내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푼수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친숙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들, 평범하지 않고 극단적인 것들, 기이하고 괴팍한 것들로 무서운 것을 공상하거나 공포영화를 감상하는 따위였다. 효진이 실종된 사건은 정은경이 불감증을 고백한 것 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게 야릇한 쾌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지방지 성격을 띤 대구의 신문들은 수사관의 말을 빌어 최근 K대의 교정에서 간간이 있어온 성폭행사건과 연관을 짓고 있었다. 인신매매범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효숙은 1주일 동안 병원에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여동생을 찾는데 아무런 진전이 없자 나는 1주일을 더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정은경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병원 생활이 흐트러지자(효숙이가 출근하지 않자 내 몫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새 경리사원을 보내 주겠다는 친구로부터도 소식이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 당장은 효숙이가 없는 이상 업무에 익숙한 도희를 내쫓고 새 아가씨를 들일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였다) 취미에 몰두했다. 내 취미래야 기껏 책을 읽거나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보는 것이었는데, 하룻밤에 세 편 이상씩의 공포영화를 보았다. 으시시하고 간담을 서늘케 하는 전율이 온몸을 훑고 자나갈 때 느껴지는 쾌감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감정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나는 공포에 대한 프로이드적인 해석을 좋아했다. ----무서운 것을 공상하는 것은 사실 다른 공상이 변형된 것이며 그 다른 공상이란 본래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의 맛을 갖고 있는 것, 모태(母胎)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공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궁회귀본능이 표출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공포영화의 거개가 한적한(구원의 손길로부터 고립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장소=모태) 산장을 세트로 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활발하고 생기에 넘친, 성적으로 개방된 젊은 남녀를 등장시키는 것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들이 악마의 제물로 되는 것도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려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펌킨헤드(호박머리)'라는 영화에서 괴물(타조처럼 억세고 튼튼한 뒷다리에다 손에는 시퍼런 칼날같이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이 폐허가 된 교회당 안에서 십자가를 때려부수는 영상은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의 상징일 수도 있다. '부활'이라는 영화에서 삽으로 목이 잘린 의사가 자신의 목을 피가 흥건한 쟁반에 담아들고 사랑하는 여자의 알몸을 훔쳐보는 장면은 정신착란적 음란증의 극대화일지도 모른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관념에도 불구하고 감독들은 공포영화를 연출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에 대한 목마름이다. 음산한 산장의 노파가 펌킨헤드의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에디와 빌리의 피를 그릇에 담아 붓는 신(Scene)은 공포영화가 필수적으로 그리는 콘티의 하나인 것이다. 에리프 프롬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피는 삶의 본질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어머니인 대지가 비옥해지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 피는 정액과 동일하며 어머니는 자궁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과정된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기껏해야 무미건조하고 나른한 현실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하는 몽상의 예술적인 이미지화에 불과한 것이다.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윤리가 삭제되어 있는 것은 원초성을 보강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찰력과 상상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이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자극된 나는 공포영화를 즐겼다. 그것은 한동안 잊혀졌던 취미를 되살리는 흥분에 젖어드는 일이기도 했다. 공포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아주 작고 어두운 방안에 갇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곤 한다. 그리고 이런 울적한 기분에 노출될 때면 미국 대통령을 저격했던 어느 미치광이의 구멍 뚫린 아파트 벽에 써 있던 문구를 되뇌곤 했다. '난 이 구멍에서 살아왔어요!(I have lived this hole!)' 효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는 한계에 부딪힌 듯 했다. 도희의 청을 받아들여 발벗고 나섰던 형사도 용빼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불쌍한 건 가족들이었다. 서울의 집에서도 마침내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러나 엄청난 현실 앞에 그저 망연자실해할 뿐 머리 수를 더한다고 도움이 될 것은 없었다. 아파트는 초상을 치른 듯이 침울하고 삭막했다. 더없이 난처해진 건 효숙의 입장이었다. 그녀는 쉽사리 죄의식을 떨쳐 내지 못했다. 여동생이 머리가 다 큰 대학생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자신이 보호자였던 만큼 충격을 이겨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상태로 더 이상 병원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다. 병결로 봐 준 것도 보름이 넘고 있었다. 나로서는 매몰차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섣불리 결정을 내리다가 뜻하지 않은 실수가 있을까 봐 도희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요새 엉망인 병원 사정을 잘 알 거야. 주사를 놓는 것뿐만 아니라 약품 구입도 일일이 내가 나서야 할 판이고 도희는 도희대로 애로사항이 많은 줄 알아. 효숙이 대신에 새 간호사를 들였으면 하는데 도희 생각은 어때?" "너무 가혹하세요. 여동생 문제만으로도 경황이 없는데 해고 통보를 받으면 언니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꾸려 갈 순 없잖아. 어려운 형편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 그러시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 보세요." "기회라면?" "효숙이 언니가 정상적으로 병원에 나오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거 아녜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까?" "어차피 언니도 여동생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한 대구를 떠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허구헌날 아파트에서 시름에 젖어 눈물로 허송세월할 수만도 없겠구요. 가족들 중에 누군가가 밥 벌이를 해야 할 테니 직장에 근무하면서 소식을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네요." 가끔 느끼던 바이지만 도희는 나보다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천박한 외모로만 보자면 그 어디에 그런 점잖고 성숙한 이면이 숨어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직 남은 문제는 있었다. "야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몸만 나오고 마음은 엉뚱한데 가 있는 걸 나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 과연 여동생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효숙이가 진득히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쉽진 않겠지요. 하지만 제가 옆에서 부지런히 거들어 주고 언니도 공사를 구별하는 길만이 하루라도 더 대구에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환자를 돌보는 데 소홀해질 정도는 아닐거예요. 일단 언니의 의사가 중요한 거니까 제가 의향이 있는지부터 알아볼게요. 가능하면 내일부터 당장 출근을 시켜 볼게요." 이렇게 해서 다음날부터 효숙이가 병원에 다시 출근하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위태위태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병원 자체로서는 효진의 실종으로부터 야기되었던 혼란을 일단락 지은 셈이었다.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효숙은 그런대로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전처럼 상냥하고 다정스런 미소를 머금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이 불친절하다고 불평을 터뜨린다거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희가 맡은 임무 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 주는 것도 그녀가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듯했다. 병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나도 다시 전의 생활리듬을 회복했다. 모든 건 정시에 시작되어 정시에 끝났다. 예기치 못하게 나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괴롭힌 일은 없었다. 시계 톱니바퀴 같은 반복된 안정 속에서 나는 기운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주일의 일은 나를 들쑤셔 성가시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았다. 나의 구심점은 뭐니뭐니 해도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그것이 중심을 잃다 보니까 매사에 불안한 게 컨디션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공포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도 되새겨 봄직한 일이었다. 비디오 감상은 밖으로 나다니기를 꺼려하는 내 성격에 걸맞는 취미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무언가 두려운 나머지 도피하려는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것이다. 흔히들 공포는 두려움의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실체가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효진의 실종이 내게 불러일으킨 것은 공포였을까, 불안이었을까? 나는 왜 폐쇄된 인격밖에 갖추지 못한 힝클리라는 저격범을 떠올렸을까? 테카르트가 근대적인 심리를 잘 간파한 것처럼 나는 사고의 무한퇴행에 빠진 듯 싶었다. 나와, 나를 사고하는 나와, 나를 사고하는 나를 또 사고하는 나....... 그것은 나의 확대이기도 하지만 본래의 나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불안(또는 공포)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의식의 수면 밑으로 침잠해서 단지 의식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던 정은경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불안은 다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선생님, 매번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사과마저 나중에는 입에 발린 말이 될까 봐 두렵군요. 마음 같아선 제때에 꾼돈을 돌려드리려 했는데 벌써 2주가 훌쩍 지나고 말았군요. 두어 번은 일요일이 아닌데도 병원이 비어 있어서 연락이 늦어졌어요. 전 지금 언니의 산소 옆에 와 있어요. 왜관에서 불곡사(佛谷寺)로 들어가는 중간쯤에 카톨릭 묘역이 있는데, 여기는 산 하나 더 들어온 곳이에요.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울창해서 더없이 공기가 신선해요. 꼬불꼬불한 산길 양옆으로는 이름 모를 잡초와 덤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누군가와 즐거운 마음으로 손을 잡고 산보를 한다면 낙원의 기쁨마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곳을 찾아올 때 제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답니다. 단순히 그것은 언니의 한맺힌 넋을 향해 옷깃을 여미는 산 자의 도리여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절실하고 간절한 무엇에 대해 절규하는 듯한 맹세의 심정이었기 때문이에요. 비록 언니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핏줄을 나눈 자매를 죽인 혐의를 받다니요! 그건 말도 안돼요! 왜 내게 그토록 가혹한 형벌이 떨어져야 하는 거죠? 정말 알 수가 없어요. 형사들은 어리석은 바보천치들이에요. 대체 수사를 어떻게 했길래 저를 용의자로 점찍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그러고서도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매월 꼬박꼬박 봉급을 받겠죠. 지옥이 있다면 애초부터 그들을 위해 만들었을 거예요. 그래요! 그리고 또 한 사람 더 지옥으로 갈 사람이 있어요. 언니를 죽인 사악한 악마! 그 범인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거예요. 유황불이 펄펄 끓는 불구덩이 속에서 뼈까지 타들어 가야 하는 고통을 맛봐야 할 거예요! 고통에 짓이겨지는 그 광경을 보지 않고는 전 영원히 발을 뻗고 잠자리에 들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제 가슴은 분노와 불안으로 밤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가득한 악귀의 소굴에서 헤매고 있어요. 신음하는 언니의 울부짖음이 귀에 생생히 들려 오는 것 같아요. 처절하게 애원하는, 뇌를 쥐어짜는 듯한 격렬한 떨림이 언니의 숨결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어요. 전 가만히 앉아 외면할 수가 없어요. 비명에 간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답답했어요. 그래서 이곳을 찾은 거예요. 언니가 보고 싶었어요. 어쩌면 언니는 저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제가 워낙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아아, 봉분의 떼가 시들어가는군요. 파란 잎은 몇 남지 않았어요. 누렇게 부황이 든 것 같은 잎만이 기울어 가는 가을 햇살을 받고 있어요. 누구나 인간은 이런 신세로 귀결되거늘 무엇이 탐나서, 무슨 바람이 들어서, 곧 꺼지고 말 정열에 애타하고 아둥바둥거려야 하는지! 언니의 무덤 앞에서 편지를 쓰다 보니 한참이나 값싼 감상에 젖어 들었던 것 같아요.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용건을 말해야겠군요. 돈을 돌려드릴게요. 분실될 위험이 있으니 편지 속에 끼워 넣기 어려운 듯하고...... 일단 한 번은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돈을 건네주는 건 다방에서도 무방하지만, 저의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과성(一過性)에 그치고 말 공간은 부적당하지 싶으네요. 병원은 경찰의 감시에 노출돼 있으니 제외시켜야겠고...... 제 욕심 같아서는 선생님 집(선생님이 총각이고 혼자 사신다는 건 거기서 우연히 들어 알게 되었어요. 사모님이라도 계셨다면 엄두도 못낼 일이죠)에서 카운셀링을 받고 싶은데 선생님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이 편지를 받을 때쯤 전화를 드릴 테니 생각해 두세요. YKMES 흥분으로 몸살을 앓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정은경의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재주는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있는 것처럼 아리송했다.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원인불명의 불감증을 치료할 때처럼 다시 한 번 나의 무지와 의구심이 일깨워졌다. ---그보다 더 절실하고 간절한 무엇에 대해 절규하는 듯한 맹세의 심정/언니를 죽인 사악한 악마! 그 범인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거예요/YKMES 왠지 눈에 거슬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경계의 심정이 되어 잔뜩 굳어졌다. 그러자 알 수 없게도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침대 밑에서 분내가 나는 볼을 얼굴에 갖다댄 채 '잘자! 오늘 밤엔 별님들이 무척 밝구나! 꿈 나라에 가면 동화 얘기를 들려줄 거야!'라고 부드럽게 위무하며 창 밖을 가리키는 손길이 지쳐 피곤해진 내 눈꺼풀이 내려닫기도 전까지 망막 위에 가물거리던 어머니....... 다 큰 사내에게도 어머니를 그리워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의식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손길일 것이다. 정은경의 편지가 왜 내게서 모성애를 향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것일까? 수수께끼였다. 탯줄을 간당간당 부여잡고 세상에 나가기를 무서워하는 젖물림처럼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심과 동정, 호기심, 아니 이 모든 것은 불감증의 원인을 밝혀 보고 싶은 직업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그녀를 어디론가 끌여들여 치료를 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대로 병원은 적당치 않아 보였다/ 언제든지 형사가 들이닥칠 수 있으므로 적절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별장에 외부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 그런 요구를 해온 것에는 반발심마저 생겨났다. 총각이니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 않느냐는 투에서 어딘지 모르게 나를 만만하게 보는 불성실함이 엿보인 것이다. 그것이 감정전이에 의한 병증의 일부인지 아니면 어떤 남자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성철학의 발로인지는 애매했다. 그럴수록 지적인 굶주림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떡하든 그녀와 상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길 원했지만, 그 장소가 마땅치 않아 몹시 신경이 쓰였다. 별장에 대한 최종 선택을 보류하고 망설임 속에 나를 맡기고 있는데, 퇴근 무렵 정은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것 같으면서도 신중하게 들려 왔다. "네, 안녕하세요? 요즘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나는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군요." "편지 받아 보셨죠?" "네, 오늘 받아 봤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망설였다. 치료실의 카우치 대신 별장 응접실의 소파를 사용할 것인지 미결정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내 의향을 알지 않고서는 선뜻 말하기가 꺼려졌던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일단 만나서 얘기하죠. 장소는 은경 양이 편한 곳으로 정하시죠." "글쎄요...... 어디가 좋을까?" "한일극장 앞에서 기다리시면 내가 차를 가지고 그곳으로 가겠소. 그 방법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기에는 가장 무난할 듯 하군요." "그래 주실래요?" "그렇게 하겠소. 약속 시간은 7시가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한일극장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끝내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불감증을 계속 치료하고픈 욕구와 별장에 타인의 발을 가능한 한 들여놔서는 안된다는 본능적인 움츠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태우자마자 동신로(東新路)를 빠져 나와 서성(西城) 네 거리를 돌아 달성공원으로 갔다. 붐비는 공원이 이런 약간 어색한 만남의 장소로서는 가장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다정한 연인처럼 상화시비(尙火詩碑)를 지나쳐 은행나무가 늘어선 공원 뒷길을 걸었다. 어둑해진 공원은 데이트족들로 만원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하이틴들이 팔짱을 끼고 히히덕거리는 것에 불쾌감이 일었지만 선선한 밤공기를 마시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희붐한 가로등 아래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은경은 핸드백에서 돈 봉투를 꺼냈다. "잘 썼어요. 큰 도움이 됐어요." "아직 여관에 묵고 계신 겁니까?" 나는 그것을 받아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는 사람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잘됐군요. 걱정을 했었는데....... 경찰 쪽은 어떻습니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감시할지 몰라요."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잔디와 덤불 숲가에 꼭 붙어앉아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일 뿐 특별히 거슬리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내 반응이 우스웠던지 은경은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예민하시군요. 말이 그렇다는 것 뿐이었는데." 나는 멋쩍어져서 담배를 피워 물며 화제를 돌렸다. "인동하 씨가 찾아왔더군요."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나요?" "그 정도까진 아니었소. 마치 내가 빼돌린 것처럼 다짜고짜 은경 양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그 점을 설득시키다 보니 은경 양의 증세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죄송해요." "사과하실 것 없어요. 병원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순간 제 병이 그 사람한테 알려지리라는 것은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은경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하한 감정도 배제된 목석 같은 반응이었다. 미혼여성이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아니 꼭 미혼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 병증이 공개적으로 까발려졌는데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심리적으로 인간을 배워 온 바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한두 가지 결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인격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대한 것일 때에는 웬만한 보상으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것이었다. 역사상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추괴한 단구의 천재 화가 로트렉은 신체적 콤플렉스로 인해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제대로 된 애정의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창녀촌을 드나들기에만 급급했다. 물랑루즈 시절의 명작들은 그의 콤플렉스가 아니었다면 세상빛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써 낸 찰스 다윈은 지독한 허약체질이었는데, 소위 공사판에서 노가다로 뛰며 밥벌이를 하는 인부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둘 모두 천재성이 콤플렉스를 없애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정은경에게는 불감증이 인격에 커다란 손상을 줄 결함이 아니란 말인가. 그녀는 그저 맹장이나 콩팥 하나가 없는 정도로 불감증을 여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뜨아해진 눈길로 그녀의 프로필을 조목조목 관찰했다. 어느 유명 여류 소설가가 그랬던가. 여자의 얼굴은 매순간 쉬지 않고 변해 가는 것이라고. 첫 진료 때 대뜸 불감증을 고백하던, 도전적인 정열을 숨기고 있던 불꽃 여자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공백을 대신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절제된 평온이 스며 드는 온화한 표정이 차지하고 있었다. 초가집 처마의 밑선처럼 완만하게 이어진 이마의 윤곽을 따라서 적당하게 솟은 코가 선명한 인중을 꼬리로 달고 있었다. 입술은 연체동물의 지느러미처럼 미끈했는데, 굴곡이 아름다운 턱과 잘 짜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득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 가냘프게 토해지는 슬픔, 바바리 코트의 깃과 갈기 같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목덜미, 약간은 낯설은 인상을 주는 귓바퀴 그리고 라일락 내음...... 그녀의 믿기 어려운 둔갑에서 수상한 요소를 더듬어 나가던 내 촉각은 어느새 정은경이 여자라는 사실에 도취되고 있었다. 그런 몽롱한 탐닉을 애써 떨쳐 내며 나는 불쑥 물었다. "YKMES는 무엇의 약자입니까?" "뭐라고 하셨어요?" 정은경은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편지 마지막에 사인처럼 쓴 것 말이오." "아, 그거요. 그건 별뜻 없어요. 은경은 약자인 YK에다 메시지의 MES를 합성해서 만든 단어일 뿐이에요. 대학시절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써버릇해서 습관이 되었던 거예요. 그게 궁금하셨더랬어요?" "아, 네...... 그런 의미였군요. 좀 걸을까요?" 나는 계속 앉아 있다가는 서둘러 결정해야 할 문제를 제쳐 두고 자꾸 딴 생각만 들 것 같아 말했다. 공원은 넓지 않았다. 5분도 안돼 우리는 정문 가까이까지 왔다. 그녀를 그냥 돌려보낸다면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선택권은 내게 있는 셈이었다. 나는 공원을 나올 때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조용한 데 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기꺼이 응해 주었다. 라는 커피전문점에서 나는 에스프레소에 밀크크림과 커피향을 첨가한 카푸치노를, 그녀는 아이리쉬 크림커피를 시켰다. 셀프서비스였으므로 쟁반을 나르는 것은 내가 맡았다. 간장종지처럼 작은 커피잔을 그러쥐며 내가 말했다. "경찰은 은경 양을 살인범으로 기소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듯했어요. 이러고 피해다닐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서 진실을 밝혀 보시죠? "시, 싫어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건 선생님에게 불감증을 고백한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에요." "두렵더라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진실의 편에서 용감하게 맞서 싸워야 해요." "이런 비좁은 찻집에서 그 얘긴 가급적이면 삼갔으면 해요." "미안하오." 나는 얼른 실수를 알아차리고 사과했다. "내가 사려깊지 못했소." 그리고 한동안 침묵으로 빠져 들다가 마침내 내가 그녀를 별장에서라도 치료를 해 봐야겠다는 최종 결정에 이르렀다. 내가 커피숍을 나오기 전 조심스럽게 의향을 전달하자 그녀는, "그 말을 내뱉기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뭐죠? 선생님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아 전 아까부터 초조했어요. 정 부담스러우시면 사양하셔도 좋구요." 라고 핀잔하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치료는 규칙적인 것이 좋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좋겠는데요. 그땐 피로가 덜해서 맑은 정신으로 유지할 수가 있으니까요." "좋도록 하세요. 전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도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녀의 호응에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늦었으니 1시간 이상은 안돼요."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식전이에요. 하지만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럼 집에 피자를 사 놓은 게 있는데 괜찮다면 그것으로 허기나 때우죠." 나는 곧장 차를 몰아 별장으로 달렸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FM을 틀어놓았다. 모짜르트의 마적(魔笛)이 흐르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정은경이 말했다. "집이 꽤나 멀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도시를 벗어나다 보니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 뿐이오. 병원에서 40분이면 충분히 오가는 거리예요." "도시 생활이 싫으신가요?" "싫어하지만 소속감을 떨칠 방도가 없어요. 때문에 난 개성이 사라져 감을 느끼게 되요. 진짜 나 자신은 없고 정신과 의사, 병원장 아무개만 남죠. 도시는 그것을 강요하고 있어요." "인간은 어차피 그런 외연(外延)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마치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희망하는 것은 무지개를 쫓는 것처럼 허망하고 맥빠지는 일이 아닐까요?" "난 다르고 싶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지 못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일까를 생각해 봐요. 끔찍하오. 대중속에 파묻혀 스스로가 타인과 구별될 수 없는 존재로 타락해 가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소." "하지만 출중(出衆)이란 드문 일이죠. 그것은 아무나 도달할 순 없는 것이죠. 하늘이 내려준 재능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얼마간의 행운이라는 고명이 덧보태진 거죠. 그것이야말로 가장 자신답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궤변이오." "그럼 선생님이 혼자서 갖고 싶은 세계란 어떤 것이죠?" "정말 미치겠는 건 나도 그걸 모르겠다는 것이오. 그건 평범한 자의 낙인이오. 아무것에도 철저할 수 없는 것--그것은 평범의 이명(異名)! 철학자의 전혜린의 에피그램이오." 은경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차는 어느새 별장을 향한 샛길로 들어서 있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억새풀이 훈풍에 하늘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까지 속마음의 일부를 드러낸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불감증의 여인! 그녀는 내가 꿈꾸어 오던 것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우리는 오븐에 피자를 데워 나눠 먹었다. 그녀가 한 조각밖에 먹지 않았으므로 나도 덩달아 식욕을 잃었다. 입가심으로 레몬티를 마신 다음 본격적으로 상담에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소파에 편안히 눕게 하고 머리맡에 이동용 소형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병원에서 마지막 만났던 날 마광수 교수의 책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때 우리의 관심은 섹스였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때의 신념들이 유효한가요?" "물론이에요." 그녀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렇담 우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겠군요. 나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을 해결할 아무 출구도 찾지 못하는 상태예요. 은경 양이 많은 것을 말하기는 했죠.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 언니와의 경쟁심리 그리고 리버럴한 성도덕......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좀더 원인 규명을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있어요. 당신이 가족열(家族熱)을 앓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철저히 천착해 들어가 봐야 해요. 아아, 그러나 감히 어디서부터 손을 댈 수 있을까!" 나는 말 자체의 감흥에 빠져 들며 넋두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이상하게도 병원의 치료실에서처럼 의사로서 긴장과 엄격함이 내부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정은경은 내게 몸과 정신을 송두리째 내맡긴 채 달콤한 잠에 취한 듯 눈을 내려감고 있었다. 나는 성대한 의식에서 주재하는 재관의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샹들리에의 불빛은 촛불의 타오름이요, 토치카에서 장작이 타는 냄새는 분향의 향기요, 그리고 창백하게 아름다운 정은경의 얼굴은 희생양이 된, 피비린내 나는 사슴의 머리처럼 무표정하면서도 무언가 근엄한 신비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내가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아요." "좋아요. 자유연상을 해 보도록 합시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규칙들을 기억하고 있겠죠?" "기억나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선생님의 꾸중을 듣게 된다, 수치스러운 얘기다,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등등의 의구심은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 주시겠죠?" "네." "좋습니다. 이번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꾼 꿈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러한 시도는 나로서는 궁여지책인 셈이었다. 모든 꿈에는 야수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꿈을 통해 불감증을 해명할 실마리를 찾을지는 의문이었다. 정은경은 미간에 힘을 모으며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다. 콧잔등까지 미세한 주름이 잡혀 간다. 전두골, 즉 이마의 백질은 이성과 자유의지의 본산인 곳이다. 이제 딱딱한 이마의 살갗은 뇌의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어요. 초조와 불안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했다는 것 외에 기억될 만한 것이 없어요." "경찰에 체포당할까 봐 그런 두려운 느낌에 사로잡힌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도 없어요. 다만......." "다만 뭡니까?" "아,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제 정신은 몹시 혼란스러워요. 실타래가 복잡하게 엉긴 것처럼 난감하고 해결책이 없어요. 마냥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에요." "낙담할 거 없어요. 은경 양은 지금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에요.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갖고 불감증에 대항해 나가고 있어요. 그 점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울고 싶다는 반응은 적어도 문제를 회피하는 건 아니니까요. 좀더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고 의식을 조절해 보세요." "아아, 그러니까 떠오르는 게 있어요. 어렴풋하게, 강가의 아침안개처럼 사라질 듯 말 듯...... 아, 갑자기 어두워졌어요! 무서워요! 사방이 막힌 깜깜한 방이에요. 창문 하나 없는 암흑의 세계예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나요?" "아무것도! 한 줄기 빛마저 차단된 오지(奧地)의...... 아, 보여요! 뭔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좁은 계단이군요. 어둠의 장막 너머로 뻗어 있어요. 전 그리로 올라가고 있어요. 계단은 나선형으로 휘어져 돌아가는데 까딱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말 것 같아요.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긴장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요. 손바닥은 땀에 젖어 축축해지고 목젖은 뻣뻣해져서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나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오르고 있어요. 숨이 가빠 오고 다리 근육이 뭉쳐서 고통스럽지만 희뿌연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아 나가고 있어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아요. 검은 문이 하나 보여요. 손잡이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어요. 땅거미가 질 무렵 두터운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신비스러운 노란색을 띠고 있어요.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은 텅빈 에어로빅 홀처럼 넓고 시원해요. 이만한 크기라면 아이들은 공놀이라도 하겠다고 야단을 치겠군요. 아, 그러고 보니 방은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아요. 가운데 무언가 묵직한 게 놓여 있는데, 조명이 너무 어두워 짐작하기 어렵군요. 다행이에요! 저는 혹시나 하고 겁을 집어먹었는데 그건 먹 빛깔의 피아노였어요. 그리로 다가간 저는 서둘러 의자를 뒤로 물리고 건반 앞에 앉았어요. 손가락 마디의 관절을 풀면서 무슨 곡을 연주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드나들며 배웠던 체르니의 소품들, 소녀의 기도와 엘리제를 위하여, 그 밖에 항상 너댓 번 실수를 하지 않고는 끝까지 연주가 어려웠던 수많은 곡, 하지만 제가 연주한 것은 제목도 리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야릇한 곡조였는데,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일단 연주가 시작되자 손가락을 제 의사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손가락은 컴퓨터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의 매니퓰레이터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움직일 뿐 음악의 미묘한 감흥이나 맛을 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연주를 그치려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했어요. 제 정신이 손가락의 놀림에 반할 때마다 형언하기 어려운 통증이 팔꿈치의 관절로부터 손톱 끝까지 찌르르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었어요.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요! 왜 저는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가 없는 거죠?" "방에 혹시 누가 숨어 들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은경 양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이어서 멍석을 깔아 놓은 상태에서는 아무것에도 몰두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요?" 나는 이 물음이 무의미한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틀림없이 부인할 거라는 점을 예상하면서. "아녜요! 거기엔 저 혼자 뿐이었어요." "그럼 어두운 방이었다는 것이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나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처음엔 어둠이 싫었지만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부드럽고 친밀하게 제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어요." "좋습니다.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나는 더 묻고 싶은 의욕을 잃고 있었다. 언젠가처럼 그녀의 꿈 얘기가 너무 도식적이고 교과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기 직전 그녀가 프로이드 심리학 입문서를 읽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날 정도였다. 은경은 소파에서 일어나자 마실 물을 요구했다. 연상에 의식을 집중해서인지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물과 함께 젖은 수건을 갖다 주었다. "위스키 한 잔 하겠소?" 나는 그녀가 긴장하는 것 같아 말했다. "아니에요. 술은 잘 못해요." "난 한 잔 하겠습니다." 나는 토치카 옆 시렁에서 먹다 남은 조니워커와 얼음을 가져와 잔에 따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 드려 은경 양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찾아내기가 어렵군요. 불감증이 어떤 고착(Fixation)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합니다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머니 쪽인지 아버지 쪽인지조차 현상태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군요. 고착이란 사랑을 가장하고서 횡횅 활보하지만 기실은 공포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관계에 불과합니다. 모친 고착을 가진 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무서워한다는 뜻인가요?" 나는 혀끝을 움직여 술맛을 음미한 후 말했다. "그건 이미 은경 양도 인정했던 점이죠. 아니면 아버지 쪽일 수도 요는 치료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그것부터 밝혀 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의밉니다. 하지만 문제는 은경 양의 내부에 적극적으로 치료에 응해 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치료를 거부하려는 욕구가 잠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선생님, 전 불감증의 고통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오고 싶어요!" "아무렴, 그래야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모든 걸 속시원히 털어놓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대체 뭘 숨기고 있다는 거죠?" "잘 떠올려 보세요. 은경 양의 기억 속에 영원히 씻어지지 않을 상처가 남아 있을 겁니다.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가 없다는 점을 용기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전 선생님의 말씀을 도무지......." 나는 위축되는 그녀의 표정에 인간적인 동정이 갔지만 전문의사로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수만은 없었다. "대학에서 은경 양의 전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국문학이었어요."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묻냐는 투였다. "그렇더라도 프로이드에 대해서는 아시겠지요?" "가벼운 교양 정도로요." "그럼 막대기나 못 그와 유사한 뾰족한 물건들이 음경을 상징하는 것은 알겠군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모자나 외투 그리고 3이라는 숫자는 어떤가요?" "모르겠는데요." "그것 역시 막대기와 같은 것을 상징해요. 그럼 여성을 상징하는 것 중 생각나는 게 있나요?" "구멍이 패인 것이나 동굴 같은 거요." "계단은요?" "글쎄요." "계단뿐만 아니라 올라가는 것 모두는 성교를 상징해요. 조금 전에 은경 양이 말한 어둠 너머로 뻗은 계단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렇다면 피아노는요?" "피아노 연주는 성적 향락이나 생식기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을 뜻해요. 그것을 은경 양의 의도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감증을 의미하구요." 은경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멍하니 열려진 구멍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 점이에요. 그 하나는 나와 상담을 하면서 은경 양이 이제까지 말한 것은 불감증이라는 현상을 나열하고 예시한 것일 뿐 여전히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과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계산되었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왠지 자꾸 든다는 점이에요." "그, 그럼 선생님은 제가 거짓으로 피아노 연주가 안되는 꿈 얘기를 상상해 냈단 말인가요?" 나는 그녀가 언성을 높여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강도있게 반문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제 겨우 한 고비의 정상에 와 있는 셈이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치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인지가 결정될 터였다. 저항(Resistance)이 분쇄되지 않는 한 치료는 한 발짝도 전진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흔히 갈등의 국면에서 환자의 반응이 그렇듯이 내 말에 충격을 받은 정은경은 벌떡 일어서며 분노했다. "모욕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군요! 저 가겠어요!" "은경 양은 무척 화가 나 있군요. 왜 화가 났을까요? 내게 아니 스스로에게 속인 게 없는데도 감정이 폭발하게 될까요? 이것이야말로 은경 양이 나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또 다른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증거인 것이에요." 은경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바리가 걸려 있는 옷걸이 쪽으로 걸아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붙잡으며 말했다. "바래다 드리겠소." "싫어요! 혼자 가겠어요." "차를 타는 곳까지 꽤나 걸어야 할 거요. 어두운 밤이라 길을 잃을 수도 있구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절 내버려두어요." "난 모른 척할 수 없소. 여기까지 데려온 이상 당신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것도 내 책임이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상황의 추이를 결정할 좀더 많은 부분을 나의 적극성에 내맡기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개가 시끄럽게 짖어댔다. 파피였다. 훈련이 안된 셰퍼드로 평소엔 잘 짖지도 않더니 오늘은 유별나게 컹컹댔다. 은경은 두려움에 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독특한 향기가 알싸하게 자극해 왔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늑함이 친밀하고 부드럽게 전신으로 흘러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것이 성적인 것이 아니길 바랐다. 그런 의식이 든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민 나머지 정은경에마저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고 말 것이었다. 마침 다행스러운 것은 불감증이라는 안전장치로 인해 그런 염려는 기우에 불과하리라는 점이었다. 그녀를 차에 태웠을 때 까닭 모를 자신감에 압도된 나는 효숙이와 K대의 교정에서 입맞춤을 하던 것과는 달리 또 다른 황홀감에 젖어 정은경을 덥석 안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나를 떨쳐 내려 했다. 그럴수록 그녀를 품에 가두어 두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 대해 유구한 세월 동안 소위 짐승 같은 수컷들이 맹목적으로 추구해 온 욕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열하고 추잡한 느낌이 배제된, 그저 여성을 안고 싶다는 느낌 그 자체였다. 놀라운 것은 은경의 까탈스런 반응이었다. 그녀는 겁탈이라도 당하는 듯이 소리쳤다. 내 손이 가볍게 등을 어루만졌을 뿐인데도 말이다. 과거에 사내를 겪은 경험이 풍부하고 스스로 그런 욕구를 즐겨 하는 그녀가 과연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 올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성에 과민하게 억압된--달리 표현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 인간들이나 보일 수 있는 적대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치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더니 지체없이 도어를 열고 뛰어나가 정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멍해진 채 운전석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거느려야 할 아내와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의문이 구체적인 물음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반성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정은경을 그런 식으로 돌려보내고 난 후 나는 내부에서 차 오르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경망스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왜 나는 효숙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 천박한 옷차림이나 외모에 대해 왜 그토록 혐오감을 떨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내가 여성에게 품게 되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정은경에게 보인 막연하고 분명치 않은 태도는 무엇인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왜 과감히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야말로 도착과 비정상적인 욕구로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자학이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 왔다. 선천적으로 나는 '현실'을 누구와도 나눠 가질 수 없는 체질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현실'을 고독 속에 가둬 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13. 충격적인 고백 정은경과의 인연은 고래심줄처럼 질겼다. 토요일 오후 일찌감치 별장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덮어씌운 비닐 안으로 파인애플과 바나나가 보이는 과일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녀를 거실로 안내했다. 소파에 마주앉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주말에 치료를 받기로 한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죠?" "물론이오. 하지만 상한 감정을 자제할 수가 있소?" "감정을 다친 건 아니었어요. 다만 무섭고 두려웠을 뿐이에요." "뭐가 두려웠던 거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요." "내가 앞으로 그런 짓을 하면 어떡하겠소?" "설마 이성을 그처럼 자주 잃으시는 건 아니겠죠? 전 선생님이 감정에 농락당하는 사람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아요. 그땐 밤이었기에 어둠이 지배하는 마력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앞으로는 낮에만 이곳에 찾아오겠어요.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구요. 이건 그 일을 잊어버리자는 뜻의 제 성의예요." 그러며 정은경은 과일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선물은 고맙지만 대낮처럼 환한 데서 치료를 할 순 없어요. 그러면 은경 양이나 나나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을 거요. 적어도 여기 거실에서 치료를 하려면 커튼 정도는 드리워야 하오." "순전히 치료를 위한 목적인가요?" "불쾌하군요. 그런 질문을 받다니." 나는 화가 났다. 한 번의 실수로 직업적 기반을 의심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인격을 두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전 제가 미웠어요!"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해 왔다. "두렵고 창피했기 때문이에요. 처음 한동안은 선생님의 어떠한 조언도 귀담아듣지 않으려 했어요. 예민한 더듬이가 자극된 달팽이처럼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딱딱한 각질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욕구와 함께 감정을 수동적이다 못해 마비상태에 이른 느낌이었어요. 허무하리만치 불안정한 목소리가 내부에서 속삭여 왔어요. '너는 절망적이다. 시도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무엇을 해도 무의미하다. 생활이 결코 좋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감증의 족쇄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저는 도저히 그 목소리를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무스(Animus)의 저주군요." "아니무스라뇨?" "어릴 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자아의 목소리죠." "저로서는......" 그녀의 얼굴은 무지의 빛을 띠었다. "이제 그런 목소리에 거역한다는 것이 두렵지 않나요?" "아직도 두려워요. 하지만 저는 불감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용기가 생겼군요." "선생님이 절 도와 주셔야 해요." "물론이오. 난 언제까지나 은경 양을 도울 거요. 두려움을 떨치세요. 그것을 이겨 내면 불감증은 씻은 듯이 나을 거요." 우리는 희망이 생겨나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녀가 마침내 저항을 인지(認知)한 것이었다. 하나의 고비를 넘은 셈이었다. 다음은 그녀의 솔직한 고백을 들을 차례였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마실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내가 인근 산에서 떠온 약수를 나눠 마셨다. "물이 시원하군요." 은경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속에서 고름처럼 물러터진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면 더 시원할 겁니다." "제가 고백을 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계시군요?" "방금 알았소." 은경은 직장 상사 앞에서 면접을 하는 신입사원처럼 자세를 가다듬어 앉은 다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는 건 말씀드렸을 거예요. 어머니는 팔방미인인 언니만을 좋아했다는 것두요. 그 때문에 저는 점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공백을 아버지에게서 메우려 했어요. 아버지에게 강한 애착을 보인 것은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였어요. 저는 제 자신이 어머니의 사랑조차 끌어낼 수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역시 어머니를 미워했군요?" "아니에요. 증오의 대상은 언니였어요. 언니는 무엇이든 제가 가지는 것을 시기했어요. 앙증맞은 아기 인형 하나, 예쁜 필통 하나...... 모든 건 언니가 독차지하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언니의 이기적인 욕심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녀가 매사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인가요?" "말씀드렸듯이 언니는 저보다 공부도 잘했고, 더 예뻤구 귀염성 있는 짓을 많이 했어요. 전 소심하고 친근한 사람 말고는 낯설어하는 편이었구요. 하지만 성격이란 치타의 가죽에 생겨난 검은 점처럼 뜻대로 지워졌다가 그려 넣었다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아버지 쪽은 어땠나요?" "아버지는 선량하고 무딘 남성에 불과했죠. 언니와 저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갈등에 대해서는 무지했어요." "아버지에 대한 애착은 성적인 것이었나요? 아니 이렇게 묻고 싶군요. 성적이었다는 것을 은경 양이 의식했나요?" "그것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성적인 애착을 일깨워 준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는 아침 일찍 러닝 셔츠 바람인 아버지의 침대로 뛰어들거나 지나친 밀착에 대해 꾸지람을 하며 못마땅해하셨죠." "질투를 느꼈단 말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머리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지난번에 말하셨는데, 은경 양은 언니와의 경쟁에서 지는 통에 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그 반사심리로 아버지에게 특별한 애착을 드러냈지만 그것마저 어머니의 제지를 받았단 말이군요." "그래요. 그 때문에 몹시 우울했어요." "그런 침울한 기분이 몇 살까지 지속됐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전에도 지적했듯이 그건 은경 양만이 유별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지가 못해요. 그 연장선상에 또 다른 계기가 있었을 듯한데요." 이윽고 나는 오랫동안 참으며 기다려 왔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고백의 순간에 느껴지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는 듯 창백한 얼굴빛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카바이트 불꽃처럼 파란색을 띠었다. 그 기묘한 아름다움이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빠져 나올 길 없는 갈등이 시작된 것은 언니가 아버지마저 독차지했기 때문이에요." "언니는 왜 매사에 욕심을 부렸을까요?" "무엇이든 지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성미였어요. 세상이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이기적인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구요. 그런 언니가 이번에는 제가 아버지의 애정을 얻어 내려 한다는 것을 알았던 거죠. 그것이 비극의 서막이었어요." "비극! 언니가 죽게 된 것이 그런 다툼에서 비롯됐다는 의미인가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이유는 됐을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선 저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언니가 가증스럽고 보기조차 싫었어요. 선생님은 환멸이 어떤 감정인지 느껴 보셨어요?" "글쎄요." "그건 싫어 미치겠으면서도 상대방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고약한 정신현상이에요. 우린 한 핏줄이라는 맹목적인 끈에 묶여 있는 바람에 서둘러 인연을 끊지 못한 게 화근이 된 셈이죠." "아버지를 두고 경쟁심이 차츰 심화되었었나 보군요.?" "그랬어요. 어릴 땐 사소한 것들이었죠. 아마 어른들이 보면 귀여운 짓이라고 미소 지을지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구요. 하지만 제겐 아주 심각했어요. 언니는 항상 승리자였기에 무감각했지만요." "그래도 한솥밥을 먹고 살아온 언니라면 기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증오심을 제어할 수 없었나요?" "의식을 하게 됐을 땐 이미 늦어 버렸어요. 아마도 제가 생각한 이상으로 언니를 미워했었나 봐요." "결정적인 동기가 있었을 듯한데요." "물론이에요. 사춘기 때였어요. 그전에도 아버지를 두고 경쟁을 할 때면 저는 언니의 힘에 못 이겨 아버지를 빼앗기고 나서 울음보를 터뜨렸지만 두고 보자는 식의 벼르는 감정이 생겨났던 적은 없었어요. 헌데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증오심은 아주 강렬해졌어요." "죽이고 싶을 만큼?" "바, 바로 그랬어요. 하지만 죽이지는 않았어요." 은경은 격한 감정에 휘몰리고 있었다. "사춘기 때였다면 중3 아니면 고1?" "고1 때였어요. 제 어린 시절 중 가장 예민한 나이였을 거예요. 볼엔 여드름이 맺혔고 이성에게 막 관심이 생겨났을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맘때 쯤이면 으레 그렇듯이 통학길에 남학생들이 추근대기 시작했죠. 하지만 제쪽에선 맹세코 그런 애들에게 눈길 한 번 준 일조차 없어요. 음심을 품고 남학생을 대한 적도 없구요. 그런데...... 그런데도 그 일이 터지고 만 거예요." "그 일이라뇨?" "절 매일같이 주시하는 핸섬한 남학생이 있었어요. 우리 학교 옆에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통학길에 버스에서 저를 점찍어 두었었나 봐요. 하루는 가족 모두가 밥상머리 앞에 앉아 식사를 하던 중에 언니가 불쑥 이렇게 말했어요. '은경인 요새 연애한데요!' 그 말에 어머닌 다짜고짜 저를 욕하시고 아버지 또한 호되게 나무라시며 화를 내셨죠. 전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항변했지만 어머니가 언니를 역성드는 바람에 전 서럽게 우는 것 외에 달리 어쩔 수 없었어요." "언니가 모함을 한 거로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절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어요. 언니는 그 학생의 이름과 학년 반까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언니는 왜 동생이 욕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싸 주기는커녕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누가 더 많이 얻어 내느냐 하는 갈등의 일환이었나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전 그렇게 느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그쳤다면 더 이상의 악감정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 며칠 후 언니는 자신의 얘기를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편지 한 장을 가져왔어요. 거기엔 저에 대한 애틋한 애정이 담긴 그 남학생의 글이 들어 있었어요. 이번에야말로 아버지는 대노하셨죠. 대체 그 양아치에게 얼마나 헤프게 보였길래 연애편지까지 보내 오느냐구요." "여고시절이면 있을 법한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텐데요." "아버진 보수적이셨어요. 그런 일을 용납 못했어요." "대체 언니는 그 편지를 어디서 가져온 거죠?" "자기 말로는 제 책가방 밑에서 우연히 주웠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이었어요." "화가 났어요?" "전 영원히 언니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어요." "그 후에 아버지와의 관계는요?" "언니가 바라던 대로 되었죠. 그날 제 몸에 매를 대셨기 때문에 더욱이나 서먹서먹해진 감정을 삭일 수가 없었어요." 은경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떨칠 수 없다는 듯이 고통스런 회상에 잠긴 모습이어서 나는 얼마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절대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감정이 고무되었다고 했는데 결국 복수를 했나요?" "물론이에요. 그것도 언니가 까무러칠 정도로요. 사실 한동안은 그런 악감정을 잊고 있었어요. 저는 곧 입시 준비에 몰두해야 했고 언니는 언니대로 대학생이 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거든요. 떨어져 있을 동안은 탈이 없었지만 문제는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반 년쯤 지난 뒤 결혼을 할 때 생겨났어요." "언니의 결혼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에요. 언니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제가 계획적으로 일을 벌이고 만 거예요. 전 언니가 평생을 저를 괴롭히다가 이제 철새처럼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은경은 이 대목에 이르자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결혼이 성사되지 않길 바랐어요. 언니가 불행해졌으면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형부가 될 사람을 유혹했던 거예요." 나는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이어 오던 리듬을 깨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다른 불순물이 섞여든 것 없이 전적으로 언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나요?" "그래요. 형부라는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었어요." "형부의 반응은?" "감정이 메마른 목석 같았어요. 형부는 언니에게 홀딱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은밀한 행동을 보여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단지 처제의 가벼운 애교 정도로 느끼는 것 같았어요." "언니가 그런 낯뜨거운 행동을 보고도 가만 있던가요?" "처음엔 언니가 모르게 형부와 둘만이 있는 장소에서 그랬어요. 그러나 그 방법이 먹혀들지 않자 언니가 보는 앞에서도 형부에게 교태를 보였는데, 언니는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언니는 몹시 질투가 났을텐데요?" "물론 질투가 났죠.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라는 것을 교활하게 계산했을 테죠. 언닌 그런 여자였어요. 아무리 감정이 상하더라도 나중의 일을 꿰뚫어 보는 무서운 눈을 가졌죠. 그러자 이번엔 나야말로 감정이 폭발해 버렸어요. 결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하루는 형부 혼자만이 언니 방에 있었어요. 언닌 잠깐 접대할 과일을 사러 슈퍼에 나갔었죠. 그 틈에 제가 언니 방으로 기어들어간 것이에요. 형부도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어색해하더군요. 하지만 전 모른 척 하며 되는 대로 지껄여대다가 언니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에 맞춰 형부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몸을 던졌어요. 언니는 과일과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죠. 그러고 나서 다음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요?" "......" 나는 호기심 어린 침묵을 했다. "전 광란에 흡사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와 죽일 듯이 저를 때릴 줄 알았어요. 그게 어릴 때 제게 보여 준 언니의 일관된 행동이었죠. 헌데, 우습게도--정말이지 그땐 고소를 금치 못했어요. 언니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리고 말더군요. 그 가관인 모습이라니!" "드디어 언니가 오해를 하게 됐군요?" "글쎄요. 아직도 저는 그날 언니가 왜 그런 나약한 행동을 보였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형부가 자긴 아니라고 열심히 달랬는데도 언니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죠." "그 후에 형부와 언니와의 관계는?" "파혼하진 않았어요. 아마 언니는 죽어도 제게 지지 싫었을 거예요. 둘 사이에 오해가 풀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파혼이야말로 제게 백기를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죠." "아까 언니와의 관계를 비극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 때문에 결국 이혼이라도 한 건가요?" "그날의 사건은 맛배기였어요. 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언니가 파혼하길 바랐지만 어쨌든 결혼을 했으니 제가 또 진 셈이죠. 거기다가 처음부터 그 정도로 물러날 거였으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언니는 제가 불러일으킨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능력있는 형부를 만난 터여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죠. 하지만 남보기에는 번지르르한 행복 뒤에 부부만이 안고 있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것은 1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다는 거였어요. 듣기로는 둘 모두 신체적인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잘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잉꼬처럼 다정하던 형부와 언니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았어요. 전 그게 형부를 유인할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끝까지 형부를 언니에게서 떼놓고 싶었으니까요." "대단한 증오심이군요. 언니에게 조금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나요?" "추호도요. 언니가 평생 저한테 해온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그땐 이미 언니는 새 삶을 시작했으니 함께 아버지 밑에서 살 때처럼 미운 얼굴을 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었잖소?" "절 나쁘다고 해도 좋아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이처럼 강한 증오심에 불타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의 감정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형부가 쉽사리 유혹에 빠져 들던가요? 아니, 이 물음에 앞서 형부란 사람은 뭘 하는 분이었는가 알고 싶군요." "형부는 인천에 위치한 중소기업의 경영자였어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 쪽에서 원목을 수입해다 가공 판매하는 회사였어요." "교육 정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대나 봐요." "꽤 부자였겠군요." "그럼 언니와 사이가 나빠진 상태에서 다른 여자를 유혹하거나 아니면 유혹을 받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군요?" "글쎄요." "은경 양의 유혹에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언니와는 달콤했던 환상이 깨진 후부터는 긴장감이 덜해진 것 같았어요." "도덕적인 자제력을 잃었단 말인가요?" "제 눈엔 그렇게 보였어요." "그렇더라도 상대는 처제인데?" "보통 경우라면 어림없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노골적으로 접근해 가자 못 이기는 척 따라왔어요." "깊은 관계를 맺었나요?" "그게 저의 1차 목표였어요. 전 형부의 아기를 낳아 석녀로 고통받는 언니의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어요." "비록 불륜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형부가 아기는 낳는 것까지 찬성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펄펄 뛰었죠. 형부는 저를 언니와의 사이에 생긴 공백을 잠시 메꾸는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더구나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처제의 아기를 낳아 세상으로부터 불미스런 이목을 집중시키려 들겠어요. 하지만 전 기어코 해내고 말았어요. 임신 소식을 전했더니 형부는 사색이 되더군요." "그 사실을 언니도 알았나요?" "물론이에요. 제 궁극적 목적은 언니가 임신 소식을 전해듣고 충격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더해서 제가 직접 알리는 것보다 형부의 입을 통해 전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아아,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차마 형부 스스로가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을텐데요." "얘기하지 않겠다면 저도 수가 있다고 협박했어요." "순순히 따르던가요?" "그럴 리가 없죠. 전 거부 못할 조건을 제시했어요." "어떤?" "아기를 지울 테니 형부의 입으로 우리 사이에 애가 생겼다는 고백을 하라고 했어요. 그게 싫으면 아기를 낳겠다고 했어요." "결과는?" "언니는 그 충격으로 이혼을 했고 전 약속대로 낙태를 했어요. 불감증은 그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했구요." 우린 긴 여정을 끝내고 불감증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언니에게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안겨 주고 얻게 된 불감증! 그것은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격과 이혼이라는 추상적 표현으로는 언니가 어떤 상태였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 남편의 외도로 인해 파탄이 나는 가정은 많아요. 아마 인류가 존속되고 가정이라는 문화의 테두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한 사회문제일 겁니다. 하지만 은경 양의 경우는 다르다고 봐요. 언니가 예민한 정서를 갖고 있는지 둔감한 정서를 갖고 있는지를 떠나 단지 남편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쇼크 정도가 아닐 듯 싶은데요. 만일 저라면 자살을 하고 싶다거나...... 하여간 그런 극단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나는 환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정서불안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얘기 자체에 흠뻑 빠져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한 번 떠들썩한 소동이 있었어요. 언니가 칼부림을 하며 나를 죽이려 했었죠.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그런 후 저는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집을 나오게 되었고 언니는 언니대로 혼자 살 궁리를 찾아 떠나갔어요." "그런 언니에게 죄의식이 들지는 않았어요?" "철이 들고 나니까 심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렇긴 하지만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여태까지의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나요?" "없어요." "털어놓은 기분이 어때요?" "시원해요.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불감증이 치료될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아요." "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죠? 우린 아직 아무 시도도 안했는데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피곤해요." 은경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지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갈등을 억누르며 고백을 하느라 몹시 힘이 들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죠." 나는 그녀를 소파에서 일어나 앉게 한 후 커튼을 걷어 젖혀 창밖의 빛이 새어 들어오게 했다. 아직 해가 다 기울지 않고 있어 빛은 강렬한 편이었다. 곤줄박이와 박새가 숲을 오가며 우짖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 왔다. 엷은 바람결에 단풍나뭇잎이 살랑거리는 것이 내다보였다. 별장 밖의 해맑은 자연현상은 은경의 고백을 축복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불감증이 곧 치료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삼인성 마비란 출구가 없는 억압에 기인하는 것이 다반사다. 이제 그녀의 숨김없는 실토는 막혔던 갱도에 숨구멍을 뚫어 놓는 것과 같았다. 내가 오렌지 주스를 갖다 주자 그녀는 살이 찐다고 사양하며 뜻밖에도 방금 전 어려운 일을 치러 낸 사람답지 않게 집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 그게 그녀로서는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요구를 애써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기는 좋지만 밤이나 휴일에 적적하지 않나요?" "출근을 할 땐 도둑으로부터 별장을 어떻게 보호하죠?" "이곳에서 사람이 죽어나간다 해도 아무도 모르겠어요." 서재를 빼놓고(그곳은 나만의 나만에 의한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집 안을 둘러보는 동안 정은경은 물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적당히 별장의 구조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녀는 마치 집을 사기로 가계약을 맺고 건물의 상태를 살피러 온 구매자처럼 매서운 눈길을 번득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자 무심코 흘려 들었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이곳에서 사람이 죽어나간다 해도 아무도 모르겠어요. 나의 과민반응을 인정하면서도 그녀의 본심이 무의식중에 드러난 실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고백이 가져다 준 피로감은 집 안을 둘러보는 동안 그 흔적조차 엿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염탐을 하듯 집 안의 구석구석에 관심을 보였다. 서재는 솔직히 누구에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선생님이야말로 비밀이 많으신 분이 아녜요?" 라고 가시처럼 찔러 오는 거였다. 나는 비위가 거슬렸다. 칭찬이든 거부의 감정이든 일체의 나 자신의 평가를 싫어하는 터였다. 나는 인간이란 자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남의 간섭이나 평가에 의해 훼손될 수 없는 고귀한 무엇이다. 그렇다고 이 관념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흔해빠진 인용구로서 나의 어두운 낭만적 사상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완결적'이라는 어휘는 인간의 절망--너무나 서글퍼 오히려 가소로워 보이는 단상(斷想)--을 볼모로 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은 안식(安息)을 포함하는 법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나아가 산술적 더하기의 법칙에 따를 때마다 추해지는 몰골과 마침내 청춘의 상실감, 화살처럼 날아가는 사(死)를 향한 생(生), 절정에서 곤두박질치는 아찔함----종교는 이런 허망한 무상을 치료하는 데 정력의 반쯤을 소모한다. 하지만 진정한 안식이란 자기완결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종교적 안식이 위선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아 왔다. 선을 위한 선(善)! 심리적 위안을 받을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고독으로 비워져 가는 불쾌감에 치를 떠는 것이다. 비밀이야말로 자기에게 가치가 있는 영역이 아닐까. 자기의식이란 그것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엿본다는 불안에 노출되면 감정이 엉망이 되어 흥분해 버리고 만다. 별장 안을 둘러보자마자 내쫓듯 정은경을 돌려보낸 것은 그런 내심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그녀를 자극시켜 다시는 접촉조차 가질 수 없는 어리석음을 범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14. 비디오 테이프 정은경의 불감증은 언니에 대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정지어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죄의식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할 때, 양심은 당자의 부도덕한 행위가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그것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자신을 둘러싼 무리(사회)로부터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의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은경의 경우 그런 공포와 언니에게 수모를 주는 행위 사이에 한치의 갈등도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불륜이 세상에 드러날 때 쏟아질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형부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니에게 철저히 복수를 하고 난 시점에서 왜 하필 그녀는 불감증을 얻게 된 것일까. 그것이 죄의식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면 그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통계적인 확률치가 잡혀 있진 않지만 흔한 경우로 알려져 있는 이런 보고가 있다. A라는 부인은 결혼 후 도저히 성교를 즐길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행위가 한창일 때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불타오르는 쾌감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고 마는 것이었다. A의 남편은 참는 데 화가 났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고약한 위인은 아니었다. 부부는 오랜 상의와 노력 끝에 적절한 꾀를 짜내었다. 침실의 유희를 앞두고 남편은 마치 화가 난 듯이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 놀랍게도 그런 의식(儀式) 후에는 A가 정상적인 성교를 즐길 수가 있었다. 이 부인은 어린이들의 생각처럼 한 번 벌을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청산된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어릴 적의 억압적인 도덕교육(죄와 생식기의 결합)이 위의 예처럼 해를 끼치게 된다. 순결을 대단히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여성이 결혼을 했을 때 남편과의 성적 관계를 싫어하고 성적 관계로부터 쾌락이 생길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성과 관련된 어떠한 상상도 그들에게는 혐오감만을 안겨 주는 것이다. 아직 미혼인 정은경의 케이스는 A 부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녀는 성적 쾌감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마돈나이며 순결이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합리적인 도덕률이 되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의 리비도적인 에너지가 아버지를 향해 충만해 있는 것이다. 물론 A 부인의 경우 아버지에 대해 닫혀있는(남성에게 소극적) 것이라면, 반대로 정은경의 경우는 열려있는(남성에게 적극적)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가 불감증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은경의 얘기대로라면 아버지는 보수적 억압의 원흉이긴 했으나, 그녀가 처한 고립(언니에 대한 열등감, 어머니의 냉대)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품은 애정이 성적인 것이라고 창피를 준 것은 어머니였으며(어머니의 그런 강제적인 일깨움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불감증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언니에게 아버지를 빼앗겼다는 것은 외로움이나 박탈감에 가까운 것이지 성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애매한--아버지의 역할이 성적인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불분명한 상태가 그녀의 불감증을 치료하는데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나는 '성적인 것'이 단순한 '고독'이나 '박탈감'보다는 강렬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의 판단이 옳다면 형부를 유혹하는 정은경의 심리에는 무언가 병적이고 성적인 도착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헌데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그렇게 쉽게(그녀의 언니에 대한 복수라고 항변하겠지만) 형부의 아기를 낳을 생각을 한 것일까?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라는 자작이 없었던 것일까? 거듭 말하거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성적인 것'이었다면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정은경은 또 한번 나를 속였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날 정은경으로부터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면담을 주말 이틀간으로 정해 놓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만나려면 6일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왠지 지루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거짓을 차단할 아무 대안도 준비하지 못했으면서 그녀를 추궁하고 싶은 욕구만 앞섰다. 이상하게도 나는 부쩍 흥분한 상태였다, 병원 생활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효숙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우울한 기분이 전염되었는지 도희마저 의기소침해 보였다. 겨울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계절은 아침마다 쌀쌀한 기운으로 별장을 나서는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수요일이 되자 정은경에 대한 몰입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 갔다. 아니, 이제 사흘 후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과열된 기다림의 심정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날 오후에 받은 뜻밖의 소포꾸러미는 내게서 정은경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누런 양회봉지로 싸인 소포가 놓여 있었는데, 무심코 겉봉을 뜯자 흔한 비디오 테이프가 하나 나왔다. 그것은 새것으로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 테이프를 생산한 회사명인 SKC라는 상표딱지만 붙어 있었다. 어찌 보면 내용물이 없는 공테이프 같기도 했다. 소포의 겉봉에는 '로이드 정신병원장 곽웅혁'이라고만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쓰여 있을 뿐 발신인인 주소나 신분을 적혀 있지 않았다. 우표가 붙어 있지 않고 날인도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체국을 통해 보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의혹을 느낀 나는 도희를 불러들였다. "이거 누가 갖다 놨지?" "제가요." 도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편함에 들어 있던데요." "누가 가져 왔는지 못 봤나?" 나는 우편배달부는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늘 오시는 배달부 아저씨겠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으므로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장난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 넣으려다가 손을 거두어 들였다. 누군가의 싱거운 장난이라고 하더라도 뭔가 목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라면 테이프를 버리는 즉시 장난을 걸어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말 것이므로, 분명 내가 테이프를 VTR에 끼워 넣고 보리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못 본 셈치고 테이프를 폐기할 때 장난을 쳐 온 사람이 배를 아파할 것이지만, 그 사람의 목적이 내가 테이프를 보는 것이라면 왜 메모지에 '이 테이프를 꼭 보세요!'라는 문구쯤 써넣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테이프를 그냥 내버릴 수 없는 이유는 서울이라면 몰라도 대구에는 내게 이런 치졸스런 소포를 보낼 위인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금방 내용이 궁금해져서 대기실의 VTR(기다리는 환자가 지루해 할까봐 대기실에 VTR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에 집어 넣고 볼까 하다가 혹시 자신의 신분이나 주소를 밝히지 않고 보내 온 것은 그만한 비밀스런 까닭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쳐 그만 두었다. 오후 일과가 끝나고 효숙이와 도희가 퇴근을 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프를 VTR에 집어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다음 화면을 주시했는데, 그 가증스런 장면에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아아, 그 끔찍함이란! 화면 가득히 채워진 것은 도희가 순결의 마스코트였던 공작비둘기에게 은단알 크기의 모이를 먹이자, 그 불쌍한 짐승들이 사지를 파르르 떠는 경련과 발작으로 고통스런 몸부림을 친 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 가는 영상이었다. 이제껏 그러려니 하고 덮어 두었었는데, 도희가 범인이었다니! 나는 가까스로 흥분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서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보자 피가 역류하듯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양주를 반 병이나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서도 증오와 적의로 얼룩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인간이 살의를 느낄 때란 이런 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의 정신은 경직되어졌다. 내 감정은 제멋대로 오락가락했다. 당장 도희를 찾아가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은 포악한 심정이 되었는가 하면, 속이 뒤집히는 통증을 견디지 못해 발광을 하며 우리의 판자를 쪼아대던 공작비둘기가 떠올라 콧마루가 시큰거리기도 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남짓 후 내일이야말로 도희가 병원에 마지막 출근하는 날이라고 못박기에 앞서 나는 좀더 이성적으로 닥친 일을 분석해 볼 수가 있었다. 대체 누가 이 테이프를 보낸 것일까. 아니, 보낸 것까지는 좋은데 왜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붙인 것일까. 더욱이 우연히 도희가 저지른 것을 무비카메라에 담았다면 그 즉시 보내 주지 않고 한 달 이상 공백기간을 두었다가 보내 온 이유는 뭘까. 몇 가지의 의문점들이 스쳐갔지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밤을 지새우며 전전긍긍하던 나는 도희를 찍은 화면에서 한 가닥 돌파구를 모색할 수가 있었다. 비디오에 담긴 신(Scence)을 순서별로 나열하면 이러했다. S1:카메라는 옥상으로 나오는 문을 잡고 있다. 그러다가 비둘기 집으로 이동. 가로대에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공작비둘기. 다정해 보인다. S2:옥상의 문과 비둘기집이 번갈아 교차됨. 다시 카메라가 옥상 문으로 이동하자 허벅지를 짧게 드러낸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보인다. S3:카메라는 그 아가씨를 클로즈업시킨다. 화장기가 짙은 도희의 얼굴이다. 잔뜩 긴장한 눈빛, 손에는 모이처럼 보이는 이상한 알약을 들고 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비둘기에게 던져 준다. S4:곧이어 두 마리의 비둘기는 날개죽지를 퍼덕이며 발작을 시작, 화면은 몸부림치는 비둘기와 약간은 괴로운 표정을 짓는 도희의 얼굴을 번갈아 담는다. S5:비둘기의 죽음을 최종 확인한 도희는 혹시 보는 사람이 없나 주위를 살핀 다음 재빠른 동작으로 옥상에서 사라진다. S6:카메라는 축 늘어진 비둘기에게 계속 앵글을 맞추고 있다가 지지직거리며 꺼짐.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카메라의 위치가 병원의 옥상과 같은 높이에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화면은 클로즈업과 전경(全景)을 교차해서 찍고 있었는데 망원렌즈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병원 뒤쪽의 가까운 어딘가에서(앞쪽 즉 길 건너편에서는 비둘기집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찍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높이로 보아 2층집의 옥상이 가장 적당한 후보자가 될 터였다. 이렇게 좁혀 나가자 잘하면 도희의 비행을 카메라에 담은 장본인을 만나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긴 하나 한편으로 그 사람을 만나 굳이 뭘 어쩌려는 거냐는 회의가 찾아왔다. 그 사람은 공작비둘기가 죽어가는 장면을 우연히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서야 내가 무척 가슴 아파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실을 밝혀 주기 위해 보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신분을 감춘 것은 도희에게 돌아갈 불이익을 생각하고, 구설수에 휘말려 끌려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도희를 해고시켜 다시는 병원에 발도 못 붙이게 하면 그만이지 새삼스럽게 비디오를 보낸 온 사람을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출근시간 때까지도 이 믿음이 확고했다. 도희를 해고하면서 흥분과 추태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까지 두고 있었다. 그런데 차를 몰아 도심으로 접어들었을 때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옥상의 문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던 비디오 신의 첫 장면이 뭔가 아차 싶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카메라맨은 마치 도희가 옥상 문을 통해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렌즈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도희가 비둘기를 죽이는 것을 우연히 카메라에 걸려들었다면 뭉게구름이 떠도는 짙푸른 하늘이나 비좁게 밀집한 주택가, 아니면 소음과 경적 소리로 들어찬 시가지 따위가 조금은 섞여들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자기 집의 옥상에서 경치를 카메라에 담았을 것이므로. 나중에 보낼 때 편집을 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런 편의까지 계산했다고는 짐작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리 짜여진 각본 하에 도희는 연기자의 역할을, 카메라맨은 촬영감독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게 성급한 비약이라면 한 보 양보해 카메라맨은 처음부터 도희를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병원에 도착해서도 미심쩍음이 깨끗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도희가 보이는 그 즉시 해고를 통보하겠다는, 집을 나설 때의 결심이 자취를 감춰 인사를 해오는 그녀를 보고서도 피하듯 가볍게 목례만 했을 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환자와의 상담에도 몰두할 수가 없었다. 정오가 되자 나는 식사를 하는 대신 옥상으로 올라가 보였다. 비둘기집이 철거된 지 오래라 드넓은 옥상에는 휴지 조각과 콜라캔이 나뒹굴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어 삭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옥상을 한 바퀴 빙 돌아가 뒤쪽의 주택가를 둘러보았다. 의외로 2층집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이 다세대 주택들인 듯했다. 그중에서 비둘기집이 있던 위치를 고려할 때 카메라가 있었을 법한 지점은 세 집으로 압축되었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와 그 집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러나 마지막 집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두 번째 집으로 들어가서 용건을 말하고 들으니, 황급히 나오느라 부시시한 머리를 손질도 못한 여주인은 다소 짜증이 난 얼굴로, "아, 그거예! 우리 아저씨는 아니라예." 라고 말해 왔다. "그럼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까?" "와 몰라예, 웬 아저씨가 잠깐 찍을 게 있다카믄서 다짜고짜 들이닥쳤는데예." "그 사람이 누구죠?" "형사 아저씨였어예." 형사!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바람에 여주인은 뜨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사람 입으로 직접 그랬습니까?" "신분증을 내보이면서 10여 분 만 머물겠다면서 그카데예." "용모는요?" "큰 체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인상이었어예. 얼굴 생김은 역삼각형이었구예." "옥상에서 무엇을 찍는지는 봤습니까?" "그것까진 못 봤어예. 방향은 저기 병원 쪽이가 싶더만......" "아,네...... 으음......"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가슴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카메라맨이 도희의 잔인한 행위를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에서 발걸음을 한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 도희가 카메라맨과 짜고서 비둘기를 죽인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상대가 신승환 형사였다는 사실이다. 도희와 그 형사는 왜 그런 잔인한 짓을 연출해서 카메라에 담아 둔 것일까? 그리고 이제 와서 그 비디오 테이프를 내게 보낸 이유는 뭘까? 효진의 실종을 두고 나를 의심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공작비둘기가 끔찍한 죽임을 당한 것은 효진이가 행방불명되기 전의 일이 아닌가.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도희가 공과금 영수증을 들고 나를 반겼는데, 나는 영수증만 뺏아 들고 본체 만체 그녀를 지나쳤다. 방으로 들어와 내 자리에 앉아서도 긴장감은 누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효진이가 실종되었을 때 효숙의 아파트에서 대뜸 도희가 나서서 형사를 알선해 준 것도 수긍이 갔다. 그녀는 형사와 친분이 있는 푼수가 아니라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은경으로부터 그런 암시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줄이야! 나는 형사의 의도를 짐작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무언가 형사가 의도하는 것이 있을 법한데, 그것이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희가 병원에서 내쫓기기라도 바란 것일까. 그것이 누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비디오 테이프를 본 내가 도희에게 벌컥 역정을 내리라는 예상을 했을 것임은 분명했다. 따라서 내가 시치미를 떼고 평소와는 다름없이 도희에게 덤덤하게 대한다면 역으로 형사의 허를 찌르는 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형사는 더더욱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있어야 할 반응이 없을 때 상대는 호기심이 자극될 테니까. 그러나 저러나 내가 왜 이 비디오 테이프 하나에 이렇게까지 초조해하는 것일까? 순리대로 비둘기를 죽인 처벌로써 도희를 내보내고 어제와 변함없이 일과에 전념하면 만사형통이지 않는가! 왜 그 간단한 일에조차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내부 깊숙한 곳에서 확실히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이 간직해야 할 어둠의 방이 느닷없이 밝아져서, 그 눈부신 빛에 온몸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공포였다. 나는 상대가 형사여서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나의 일로 타협을 하거나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삶의 이유--내가 생겨먹은 대로 본능에 충실한 나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거리의 군중들과 구별되는 나여야 한다. 그들이 내게 추파를 던지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오직 나에 의해서만 변경되거나 고쳐질 수가 있다. 아아, 도희를 깜쪽같이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불안을 감당할 수 없는 나머지 살의가 맹렬하게 솟아났다. 한참 후 감정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도희를 인터폰으로 불러들였다. "밖에 기다리는 환자가 얼마나 되지?" "예닐곱 명쯤요." 새침을 떠는 표정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다. "내일 예약된 환자는?" "글쎄요. 자세한 건 차트를 봐야겠는데, 다섯쯤 될 거예요." "모두 취소시켜!" "네? 무슨 말씀인지......" 도희는 귀를 의심하며 물어 왔다. "진료는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 안하겠어. 예약된 환자에게는 전화를 걸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 달간 문을 닫게 됐다고 사과를 드려." 그것이 나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심리적인 의미다. 도희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벼, 병원 문을 닫다니요?" "말 그대로야. 한 달 간 내부수리를 해야겠어." "개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수리예요? 제가 보기엔 서둘러 고칠 만한 데가 없는 것 같은데요."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쉬는 동안 급여는 지불할 테니까 그런 걱정일랑은 말구." 나는 내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말했다. 도희가 아니 그녀와 연결돼 있는 형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다음 문제였다. 다음날 아침부터 병원의 집기들을 별장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인부 네 병에 10톤 트럭을 빌려 썼는데, 두 번이나 오갈 정도로 짐이 산더미였다. 갑작스런 일이라 무리가 따랐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책상과 캐비닛이 날라지는 동안 지난 주에 진료카드를 만들었던 환자들이 몰려와 항의를 해대는 바람에 충분한 보상금을 지불하여 달래서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다. 환자의 병명과 진료기록이 들어 있는 디스켓과 카르테는 도희와 내가 취급했다. 그것들을 중요한 약품과 함께 따로 내 차의 뒷트렁크에 담아 옮겼다. 별장 1층에 빈 방 두 개가 있었지만 병원의 가구와 일체의 집기들을 들여놓기에는 턱없이 비좁았다. 풀어 놓은 짐을 정리하던 마흔도 안돼 보이는 나이에 이마가 훌렁 벗겨진 인부 하나가 내게 와서 말했다. "집마당에 남은 짐들은 어떻게 할까요?" "왜, 더 여유가 없어요?" "다 들어찼구먼요. 여기 응접실에 들여놓을까요?" 응접실은 그런 대로 넓었지만 정은경을 이곳에서 치료해야 하는 나로서는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어수선하고 답답한 환경에서 환자는 좋은 상담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내가 머뭇거리자 사람 좋아 보이는 인부는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짐을 부릴 때 보니까 북향쪽에 지하실이 있는 것 같던데 거기에 집어 넣을까요?" "안됩니다! 거긴 너무 더럽고 습기가 많이 차요! 오래 방치되면 물건이 썩을 염려가 있어요. 좋아요. 저 책상을 옆으로 끌어 당기고 이쪽 벽만 채워 주세요. 나머지는 밖에 그대로 둬두구요." 나는 느닷없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인부는 놀란 나머지 멀뚱한 눈길로 쳐다보다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지시대로 해 줘요." 30여 분 후 인부들은 일당을 챙겨 가지고 돌아갔다. 밖에 남은 물건은 병원 대기실의 소파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비닐천을 덮어씌워 임시로 비막이만 해 두었다. 그러고 보니 별장의 거실에 남은 건 도희와 나 단 둘이었다. 의식적으로 그랬던 건 아닌데 정신없이 서류를 나르다 보니 그녀로서도 훌쩍 가기가 뭐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 역시 하루 종일 이삿짐에 시달리느라 몹시 지쳐 보였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제가 뭘 한 게 있다구요. 헌데 전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아요. 멀쩡한 병원을 왜 수리하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까닭을 물어 본다고 해서 화를 내시진 않겠죠?" 도희는 이삿짐을 나를 작정으로 단단히 마음먹고 나왔는지 진홍색 잠바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이었다. 얼굴 화장도 옅었다. 이렇게 수수하게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모습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수더분하게 친근감을 주는 인상이야말로 그녀에게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저 순진한 외피 뒤에 비열한 본색이 독사의 혀처럼 날름대고 있다고 여겨지자 나는 닭살이 돋듯이 소름이 끼쳤다. "그게 궁금한가?" 나는 내심을 읽기 위해 그녀의 얼굴표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궁금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효숙인 안 그렇던데." "그 언니야 여동생 문제로 정신이 빠져 있으니까 뭔들 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오늘도 나오지 않았어요." 확실히 내가 비디오 테이프를 받은 후의 도희는 그전의 그녀답지가 않았다. 그녀는 효숙이에게 불 같은 질투심을 드러내고(효진이가 실종되기 전까지의 일이긴 하지만) 나는 모든 것에 사춘기 소녀다운 호기심을 보이던 생기발랄함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나 그저께 받은 비디오 테이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에 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한번 보자고 떼를 쓰며 졸라댈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병원 문을 닫는 것에 대해서만은 유독 의욕을 앞세우며 알고 싶어하고 있었다. "행여 내가 문을 닫은 게 도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겠지?" 나는 서투른 표현이지만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겠어요? 어제 저 고민 많이 했어요. 안 그래도 제 옷차림에 눈에 거슬린다고 누가 역정을 내신 데다 최근에는 저를 내쫓고 신입 경리사원을 들이겠다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전 나름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선생님의 마음에는 늘 흡족하지 않은가 봐요." 도희는 때 아니게 눈물을 보였다.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대는 통에 나는 깜빡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래, 그러니 썩나가주렴!'이라고 단칼에 자르면 그만일 것을 측은한 모습에 혼동된 나머지 입에 발린 말을 내뱉은 것이다. "아냐, 도희가 일에 불성실했기 때문이 아냐." "그럼 왜죠?" 도희의 눈은 야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놀라운 변화--그것은 연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 자꾸 따져 묻지? 아니라고 했으면 충분한 거 아냐." "선생님! 이상하세요. 우리들에게 병원 문을 닫는 것쯤 못 알려 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야 마무리되지 못한 일을 처리하기도 편리할 거구요. 내부수리를 하시겠다는 거 진심이 아니시죠?" "살구색이 싫어. 병원 내부를 연한 녹색으로 다시 칠할 거야." 이것은 두 번째 실수였다. 궁지에 몰려 말이 아무렇게나 나온 것이다. "페인트를 칠하는 게 목적이라면 집기들을 한 쪽으로 몰아두고 작업을 해도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간으로 충분해요. 한 달씩이나 병원 문을 닫는다는 건 말도 안돼요. 대체 뭘 두려워하시는 거죠!" 두려워하다니! 병원 문을 닫는 그 어디에서 내가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일까 나는 그저께부터 오늘까지 내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몹시 신경을 쓰며 조심했었다. 그녀에게 흠을 잡힐 만한 어떠한 말도 행위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란 그녀가 갑작스럽게 변한 나의 태도에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두려워할 것이 있다는 짐작을 하면서 던진 질문이 아닐까? "왜 내가 뭘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거지?"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병원 문을 닫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 표현이 잘못됐다면 말 못할 사정이 있던가요?" "말 못할 사정?" 그것은 마치 당신은 내가 비둘기를 처참하게 죽인 것을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알게 되었으면서도 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느냐는 것처럼 들렸다. 아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형사가 그 테이프를 보내 온 것은 나를 자극해서 반응을 가다려 보자는 수작인 것이다. 도희는 형사가 달아 놓은 미끼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순간에도 별장을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혹에 사로잡힌 나는 후다닥 2층의 서재로 뛰어올라가 언젠가 경마를 좋아하던 환자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벨몬트 망원경을 들고 다시 배란다로 나갔다. 렌즈에 눈을 처박고 사방을 살폈다. 보이는 것은 소나무숲과 길가에 피어난 잡초들 뿐이었다. 조금 있자 삽을 든 꾸부정한 초로의 농부가 샛길을 따라 황소고삐를 잡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이 보였는데, 형사의 위장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사방을 눈여겨보아도 이상이 없는 것 같아 거실로 내려왔다. 도희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묵살한 일방적 행동에 화가 난 것일까. 빈 테이블 위에 메모지가 남아 있었다. 서둘러 쓰느라 그랬는지 글씨가 삐뚤삐뚤했다. --약속이 있어 가 봐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전화 걸께요. 그때 할 일을 알려주세요. 정 할 일이 없으면 짐 정리라도 거들께요. 나는 다시 2층 베란다로 나가 망원경에 눈을 가져 갔다. 도희가 종종걸음을 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몹시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간간이 뒤돌아 이쪽을 힐끔거리며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한다. 자꾸 뒤를 살피는 태도로 보아 약속 때문에 서둘러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두려운 곳으로부터 탈출한 사람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에 발목이 잡힐까봐 줄달음질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황급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도희가 갑자기 보인 반응에 의문이 갔다. 그녀는 알아내고 싶은 게 있어 캐묻는 듯한 태도로 관심을 보이다가 잠시 내가 일방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허겁지겁 달아나듯 별장에서 빠져 나간 것이다. 그녀는 대체 무엇에 두려움을 느꼈을까? 내가 자리를 비운 게 무슨 흉기라도 집어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1층의 거실로 내려왔으나 왠지 도희를 그냥 보낸 게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희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들이대며 물불 안 가리고 다그쳤어야 한다는 반성도 생겨났다. 끝내 참을 수 없어 나는 무작정 별장을 뛰쳐나왔다. 애마(愛馬)인 흑색 프린스를 몰고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덜컹대는 황토길을 달렸다. 주변의 경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굉장한 속도를 냈다. 마침내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국도변으로 나왔을 때 도희의 쥐색 엑셀을 미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엑셀은 서부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쳐 남구 대명동 방향으로 빠져 나갔다. 나는 미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바싹 뒤쫓지는 않았는데 그로 인해 놓쳐도 무방하다는 기분으로 차를 몰았다. 도심으로 들어온 엑셀은 얼마쯤 가다가 간선도로에서 이면도로 빠지더니 양옆으로 조잡한 상가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서 차를 세웠다. 나는 30여 미터쯤 뒤떨어진 곳에서 재빨리 골목 안쪽으로 차를 주차시킨 다음 운전석에서 내렸다. 골목을 되돌아 나왔을 때 운전을 했던 사내가 차 옆에 내려서서 도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대담하게 최대한 그들 가까이로 접근해 갔다. 사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잠바 차림으로 도희와 막 헤어지는 순간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놀랍게도 정은경의 애인인 인동하였다. 도희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인동하는 엑셀을 되돌려 간선도로로 빠져 나갔다. 차가 옆을 지나칠 때 나는 슬몃 외면하며 얼굴을 감추었다. 이어 재빨리 도희가 사라진 골목을 향해 뛰어가다가 걸음에 힘이 빠지며 도로 돌아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는 도희가 사는 동네여서 귀가하는 그녀를 미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둘은 대체 어떤 사이일까? 인동하는 여전히 내가 정은경을 빼돌렸다는 의심을 못 버리고 도희에게 접근해서 뭔가를 캐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도희가 경찰의 끄나풀인 것처럼 인동하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일까? 별장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머리 속은 혼란스러운 의혹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15. 어머니 도희의 비행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와 인동하의 알 수 없는 행동은 48시간 동안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은경과의 상담 시간이 다가왔지만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인동하와 도희가 수상쩍게 만나는 것을 목격한 다음날 도희로부터 전화가 와서 도울 일이 없겠느냐고 물어 왔을 때 나는 당분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화를 내며 끊었다. 나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생겨나는 일련의 의혹 짙은 일들에 촉각이 곤두서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지 시작했다.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불안이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에 대항하는 상태'라면 나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의혹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무더위로 지내다가 토요일 오후 정은경을 맞아들였다. 나는 그녀가 카우치에 비스듬히 눕던 자세로 소파에 눕고 나서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불감증을 깨닫게 된 시점이 언니와 형부가 이혼을 하고 나서입니까, 아니면 언니가 죽고 나서입니까?" 우리는 지난번에 마무리짓지 못했던 그 대목에서 다시 시작했다. "글쎄요. 그땐 남자 친구가 없었던 때라 정확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마 언니가 이혼한 직후일 거예요." 정은경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언니가 이혼을 한 것에 대해 철이 들고 나니까 후회스럽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습니까? 혹시 혼자 있을 때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적은 없었습니까?" "그랬던 적은 없어요. 원인 제공은 어디까지나 언니가 한 것이라는 믿음은 아직도 확고해요. 다만 그 방법이 지나쳤다는 생각은 하지만요."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문화적인 금기에서 비롯된 신경증적 죄의식이 불감증이 원인이라고 보여지는데, 은경 양은 형부의 아기를 밴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나요?" "전혀라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보통 사람이 상상하듯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없었어요." "어릴 때 그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배웠을텐데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역사 시간에 이런 것도 배웠어요. 형사취수제나 그와 유사한 제도가 고려 때까지 성행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야 금기로 자리잡았다더군요. 그건 다시 말하면 역사적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가 아니잖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그 정도로 대담하게 수치심을 떨칠 수 있다니! 놀라운 여자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다면 왜 아기를 낳지 않은 거죠? 은경 양의 행동이 철저하게 언니에 대한 복수에 구속된 것이라면 형부의 아기를 낳음으로써 최상의 복수극을 연출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글쎄요. 전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보지 않아...... 하여간 잘 모르겠어요." "그건 달리 말하면 은경 양이 주저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언니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증오심의 이면에 그렇게 해서는 인간 이하라는 윤리의식이 자극된 것이 아닐까요?" "윤리의식에 자꾸 저의 행위를 결부시키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여요. 거듭 말하지만 전 그 일로 자학하거나 죽도록 괴로워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녀가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으므로 나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맴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기는 하나 인두겁을 쓰고 형부의 아기를 가진 여자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이 의문점이 풀리지 않고서는 불감증의 원인도 밝혀낼 수 없으리라는 낙담이 엄습해 왔다. "언니가 죽은 건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질문의 포신을 돌렸다.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 주변상황에 초점을 맞춰 보는 것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였다. "......" 은경은 소리 없이 한동안 침묵했다. 곧이어 언니의 죽음이 상기되자 슬픔의 누선이 자극된 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왼주먹을 힘껏 움켜쥔다. 관자놀이가 시퍼렇게 부풀어오른다. "언닌 사귀던 남자 친구한테 살해당한 것 같아요." "남자 친구?" "언니는 이혼 후에 여러 남자와 교제를 했었나 봐요. 그중에 한 명일 거예요."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아, 아뇨."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그럼 그 남자가 언니를 죽였다는 것은 막연한 짐작이군요?] "짐작이긴 하지만 막연한 건 아녜요. 전 확신해요." "그야,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게 아니라 은경 양이 언니의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해서요?" "그렇지 않았어요." "과거의 증오심 때문에 언니의 시체를 보고도 무덤덤했나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 말은 언니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예요. 또 볼 수도 없었구요." "볼 수가 없었다니요?" "언니의 시체는 찾지 못했어요." "시체를 찾지 못했다면 죽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언니가 사는 아파트는 현관까지 피가 넘쳐 흘렀어요." "끔찍하군요." "네, 아주 끔찍했어요." 회상 속을 더듬듯 그녀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그럼 지난번 편지에서 언니의 산소에 갔다는 것은 어떻게 된 거죠?" "언니의 유품을 모아 가매장했어요. 나중에 시체를 찾게 되면 그때 다시 정식으로 매장할 거예요." "형사가 은경 양에게 혐의를 두고서도 잡아들이지 못한 건 언니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그래요. 그 때문에 전 지난 1년을 시달려 왔어요. 형사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해요!" 그녀는 발작하듯 도리질을 했다. "경찰은 제가 언니를 어딘가 비밀스러운 곳에 유기했다고 믿는가 봐요. 그래서 하이에나처럼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거죠." "하이에나?" "시체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으니까요." "아, 네......" 나는 불감증에 대해 더 이상 논리적으로 추궁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대화는 핵심을 벗어나 공허하게 겉돌고 있었다. 환자의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에까지 신경을 집중해도 부족할 판에 나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듯이 멍한 기분이었다. "그 살인자는 마음이 편할까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불쑥 물어 왔다. "피를 보며 잔인하면서도 격렬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초조할 테죠. 그 살인자를 증오하나요?" "제 손으로 죽이고 싶도록." "그렇담, 이상하군요. 은경 양은 언니를 증오한 게 아니었나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 살인자는 은경 양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전 언니를 증오했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전, 다만......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자는 제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어요." "가장 소중한 것이라뇨?" "그건 아마...... 머리가 아파요! 쉬고 싶어요!" 은경은 크게 제스처를 쓰며 손바닥으로 체온을 재기라도 하듯 이마를 짚었다. 그것이 무대 연기처럼 과장스럽다는 것은 금방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가 뭔가를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녀였지만 나 자신도 피곤하고 쉬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두통이 심해지며 콘텍 600을 먹은 듯이 몽롱해졌다. 은경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통스런 기억을 참아 내는 것 같았는데, 그 짜증스런 인상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찾아왔을 때부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왜 들었는지를 마침내 깨달았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를 닮았던 것이다. 아아, 그립고도 두려운 이름! 전류에 닿은 듯한 충격이 전신을 뚫고 지나갔다. 원초의 우로보로스! 꼬리를 물고 있는 뱀! 나는 깨끗한 사랑의, 두려움의, 지식의 그리고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다. 또한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것이며 나의 수중(手中)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심연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칼날처럼 높이 치솟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다음 순간 끝 모를 소용돌이에 빠져 드는 막막함이 덮쳐 왔다. "선생님 우시는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은경이 이렇게 묻는 바람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소." "우셨나 봐요?"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말을 묵살한 채 마주 바라보이는 표정에 집착하고 있었다. "아니, 난 괜찮소. 조금 피곤할 뿐이오."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스스로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내가 마비라도 일으킨 듯이 소극적이 되어 말수가 줄어들자 그녀는 내 기분을 눈치 채고는 말했다. "우울해 보여요. 저, 가 볼게요. 내일 올게요." "아니오. 내일은 내가 볼일이 좀 있어서......"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처럼 문제점을 파고들지도 못하고 주저앉는 듯한 무능함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그때 봅시다." 나는 그녀를 돌려보내고 나서 버릇처럼 게보린 두 알을 먹고 잠을 청했다. 정은경이 누워 있던 소파의 바로 그 자리에서 양수 속의 태아처럼 무릎을 턱까지 끌어올린 자세로 아주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거센 비바람이 거실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굵은 빗발의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6시가 안되었는데도 짙은 먹빛 어둠이 입성해 있었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열어 놓은 창문을 닫아 건 다음 샤워를 하고 나서 컵라면으로 적당히 허기를 때웠다. 라디오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3~4일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무료하게 TV를 보다가 다시 곯아떨어졌다. 꿈을 꾸었다. 나는 개울가에 서 있었다. 개울물은 기름 폐수가 섞여든 것처럼 혼탁해 보였다. 내 또래의 청년들이(꿈에서 나는 10년쯤 젊었다) 의기양양하게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이고 흙탕물을 튀기며 개울을 건너갔다. 개울물은 장딴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만 구정물이 튀어 옷을 더럽힐 뿐이었는데, 누구 하나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만은 왠지 움츠러들며 건너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건너편에서 고함을 치며 오라고 손짓을 해댔다. 막 건너려는 찰라 나는 자석같이 강한 흡인력에 이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두워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나는 멈칫했다. 손짓을 해대며 소리치던 친구들이 실망을 하며 돌아섰다. 그들이 개울 건너의 덤불숲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말뚝처럼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꿈은 단절되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의대 시절, 화사한 봄의 교정(校庭)이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의 향기가 벤치 사이로 진동한다. 나는 머리결이 아름다운 여자와 손을 맞잡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 단 둘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코앞에 어머니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꾸짖는다. 나는 어머니를 밀쳐 쓰러뜨리며 애인의 손을 잡고 달아난다...... 꽝! 천둥소리에 놀라 나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에 창문들이 파리하게 떨렸다. 연속되는 번개 빛과 천둥소리 사이로 개짖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파피의 울부짖음이었다. 녀석에게 견디지 못할 일이 닥친 것 같았다. 나는 1층 거실에 내려왔다. 테이블은 담배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와 빈 버드와이저, 맥주캔, 콘칩 부스러기로 어지러웠다. 그 아래에는 벗어 던진 양말과 냄새 나는 담요, 끄적거린 종이 뭉치들...... 이제 익숙해져 버린 내 생활의 일부였다. 나는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쓸어담아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앞세워 시선으로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대항하며 손전등으로는 잔디 위로 깔려 있는 디딤돌을 비추었다. 바닥에 흡수되지 않은 물이 질펀히 괴어들고 있었다. 파피는 내가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나는 쓰레기를 해치운 다음 개집으로 가 보았다. 개집의 천장이 파손되어 판자가 너덜너덜했다. 그 때문에 들이치는 비바람을 파피는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녀석은 철조망을 앞발로 긁어대며 반겨 왔다. 나는 개목걸이를 고리에서 빼서 녀석을 현관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온몸이 흠뻑 젖은 녀석은 털을 쭈볏대며 몹시 떨고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 주고 데운 우유를 먹인 다음 녀석을 현관 신발장에 매놓았다. 그러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유순해진 눈망울로 끙끙거리다가 곧 잠에 빠져 들었다. TV를 켰다. 안테나가 망가졌는지 지직거리며 고른 화면을 전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TV를 끄고 신문을 펼쳐 들었으나 골치만 지끈거리는 것 같아 내팽개쳤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집어 들고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병원 문을 닫은 게 잘한 짓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나의 과민반응을 탓하고 나무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겐 그런 나무람을 해 줄 사람조차 없다. 고목과 외로움은 수족처럼 나를 지탱하는 내 존재의 근간이 된 지 오래였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남들과의 교재를 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이상을 의미했다. 나는 심원해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닿아 있는 것--운명에 대항해 맞서 싸우는 정열에 불타 나의 전부가 잿부스러기로 조각나도 무방하다는 심정이 허용되는 생활, 제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가치가 나를 조금도 괴롭힐 수 없을 것, 특히 여자가 보이는 음탕함에 철저히 경멸을 보낼 것 ---이 고독 속에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어 왔다. 그리고 대구에 내려오기까지 나는 스스로 정한 규율과 정위(定位)에 추호도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홀로 있을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고 소리쳐 왔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자존심에도 조금씩 틈새가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나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짓눌린 어깨는 기력이 빠져 더 이상 외로움을 지탱해 내기가 힘들었다. 도희, 주검이 된 공작비둘기, 형사, 인동하, 어머니를 닮은 정은경의 얼굴이 기억의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보고 싶은 어머니! 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름끼치는 욕구가 고동쳤다. 그것은 두 개의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소리였다. 이성으로 무장된 의식적 자아가 무의식의 블랙홀로 빨려 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비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 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빗물은 물을 타고 내려 목덜미로 파고 들어 왔다. 금세 셔츠가 젖어 무게가 느껴졌다. 걸을 때마다 젖은 걸레로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첨벙대는 별장 뒤로 돌아가 지하실 입구에 섰다. 지하실로 들어서는 계단의 난간 옆에는 갖가지의 화분들이 즐비해 있었다. 개망초, 팬지, 포인세티어, 선인장, 석죽, 알로에 그리고 별장 주변에서 나는 이름 모를 풀꽃까지...... 나는 그중에서 선인장의 밑둥을 손가락으로 파기 시작했다. 귀퉁이 흙을 5센티쯤 파내려 가자 손바닥 크기의 비닐봉지가 나왔다. 비닐봉지 안에는 열쇠 두 개가 엮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지하실 문이 막아섰다. 번쩍하는 한 줄기 빛에 녹슨 철문이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발밑에는 배수가 되지 않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젖어든 발가락이 신발 속에서 미끈거렸다. 천지를 무너뜨릴 것 같은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손등으로 이마의 물기를 훔쳐 낸 다음 열쇠 하나를 자물쇠 구명에 꽂으려던 나는 자물쇠의 고리가 쇠톱에 쓸려 있는 자국을 보았다. 누군가가 톱으로 자물쇠를 끊어내려고 애를 쓴 듯 쇠고리에 여러 줄로 흠집이 나 있었다. 흠집의 정도로 보아 5분 이상 톱질을 해댄 것 같았다. 특수강으로 제작된 자물쇠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잘라 낼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뒤이어 파피에게 집을 맡겨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생겨났다. (지하실에 이미 침입을?) 거기까지 예감이 미치자 나는 서둘러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꽂았다. 급히 서두른데다 자물쇠 자체가 뻑뻑해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예닐곱 번을 시도하고서야 겨우 열렸다. 덜컹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관처럼 빈 공간이 있고 그 안쪽에 오동나무로 짠 문 하나가 또 있었다. 그것 역시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는데, 바깥 것처럼 흠집이 나 있지는 않았다. 그 문마저 열어젖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려 형광등을 켜고 밀폐된 공기가 빠지게끔 팬벨트를 돌렸다. 웅웅거리는 소음에 철계단을 내려밟는 소리는 묻혀 버렸다. 시큼들쩍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그것은 농유산과 중크롬산칼리가 섞인 진한 산성의 독성이 담긴 악취였다. 그것은 목욕탕의 욕조처럼 생겨먹은 네모반듯한 탱크에서 스며나왔는데, 나는 그곳을 지나쳐 지하실을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가 침입해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내부의 물건들은 모두 내가 놔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 나는 중앙의 스테인리스 테이블로 갔다. 바닥에 다리가 고정된 테이블 위에는 검은 관이 포개져 있었다. 그 옆에는 벽에 철사로 붙들어맨 선반이 있고 가발을 뒤집어쓴 여자 마네킹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빗을 집어 들고 마네킹의 가발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메마른 돼지털 같은 머리카락을 윤기나는 무스스프레이를 뿌려가면서 10여 분간 정성들여 다듬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마네킹의 눈동자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눈 부위에 예리한 송곳에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네킹은 싸늘하면서도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미끈한 피부는 막 빚어 놓은 도자기의 표면처럼 반들거렸다. 나는 기름걸레로 얼굴을 닦는 작업을 마무리짓고 나서 관을 내려다보았다. 관은 위쪽 1/4쯤이 불룩 양옆으로 튀어나와 비대칭인 마름모꼴을 하고 있었다. 십자가를 본뜬 모양이었다. 죄와 벌의 상징! 십자가는 내게 부정적인 의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둥근 고리를 양손으로 잡고 삐걱거리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매캐한 먼지가 풀썩였다. 관의 몸체와 문짝의 이음새가 덜거덕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그것은 멀리서 공허하고 아련하게 들려 오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빨간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는 나의 어머니였다. 아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살이 발라진 앙상한 해골과 뼈대가 비닐 코트 안에 둘둘 감겨 있었다. 짧은 코트 아래로 정갱이 뼈와 으스러진 발가락이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톱 크기와 흑거미 하나가 여러 개의 다리를 놀려 경골과 비골 사이를 재빨리 가로질러 가관이 드리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살아 있을 땐 잇몸에 감춰져 있어야 할 부분이 드러난 이빨은 흡사 탐욕스럽게 웃고 있는 것처럼 음흉해 보였다. 검은 동굴을 연상시키는 두 눈에는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걷어치우며 삐뚤어진 레인코트의 칼라를 바로잡았다. 목에는 빛이 바랜 십자가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금십자가 목걸이를 V자로 파여진 네크리스에 어울리게 걸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살아 생전 귀에는 방울소리가 날 것 같은 밤톨만한 귀걸이를 즐겨 달았었는데, 그것의 한 짝을 쥐가 관을 뚫고 들어와 물고 가는 바람에 나머지 한 짝은 패물함에 담아 보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나는 시체를 미이라로 처리할 생각을 했었다. 상세한 지식과 작업도구까지 준비해 두었었다.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뇌수 제거수술로 시작된다. 드릴로 두개골에 개구(開口)를 파고 적출할 수도 있지만 전통적인 방법을 따라 콧구멍으로 쇠바늘을 삽입해 긁어 낸 다음 남은 찌꺼기는 약물을 주입해 녹여 내린다. 그런 다음 아랫배 왼쪽을 9센티 가량 도려내고 내장을 제거한다. 그리고 나서 그 속에 밀짚, 베, 약초 등을 채워넣어 사체가 본래의 형태를 보전케 한다. 탄산나트륨이 담긴 통이 사체에서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습기가 빠지면 복강을 비우고 사체를 야지솔로 세척한다. 그런 다음 방부처리 후 마지막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정성들여 이마에 붕대로 감싼다...... 그런데 이 계획이 차질을 빚은 것은 순전히 극성스런 파리떼 때문이었다. 일이 서툴러 탄산나트륨이 습기를 충분히 빨아들이지 못해서인지 구더기가 배꼽 주변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을 부분적으로 도려낼 수도 있었지만 구더기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농유산과 중크롬산칼리를 이용하여 살덩어리를 녹여냈다...... 한동안 해골을 내려보고 있자 내 마음은 평온해졌다. 어머니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나를 위협하는 불안을 말끔히 씻어 주는 듯했다. 나는 어머니에 녹아들어 그녀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자유와 개별성을 포기하자 안락함이 찾아드는, 그런 쾌적함이 전신을 주무르는 듯했다. 만일 내가 정은경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막연히 짐작했던 것처럼 그녀가 음탕함과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없는 불감증 환자여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완전히 만족한 시선으로 언제까지고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다가 문득 오슬오슬 느껴지는 싸늘함에 아득한 도취에서 깨어나며 밖으로 나왔다. 누그러들 기미가 없는 비바람이 별장 주위의 나뭇가지들을 억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연약한 나뭇가지들은 갈대처럼 바람 부는 대로 휩쓸려 다녔다. 그럴 때마다 쏴아쏴아 하는 소리가 칠흑 같은 산속으로 울려퍼져 나갔다. 나는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졌는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다음에야 지하실을 떠났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기척에 깨어난 파피가 끙끙거리며 앞발을 내밀었다. 나는 목줄을 풀어 주며 앞으로는 녀석이 밥값을 하기를 기대했다. 개집에 묶여 있는 바람에 녀석은 침입자에 대해 공허하게 짖어대기만 했을 것이다. 거실로 돌아온 나는 젖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오싹하던 한기가 조금씩 가셔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별장을 뒤진 것일까?) 당초에 금품을 노렸다면 방안을 휘젖고 다닐 일이지 쓸데없이 자물쇠로 채워진 지하실을 뒤지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병원에 출근했다가 돌아왔을 때 한 번도 현관문이 열려 있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침입자는 지하실을 노렸던 것이 아닐까. 주인의 부재를 틈탄 평범한 좀도둑이 아닌 것이다. 사실 집 안 내부에는 금품이 없었다. 기껏해야 생활필수품인 전자제품과 장식용 도자기 정도가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그것들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라 만일 도둑을 맞았다 하더라도 집을 비우고 출근해야 하는 이상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지하실의 자물쇠만은 톱에 쓸려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을까?) 16. 논쟁 비는 다음날 내내 그치지 않았다. 워낙 장대같은 비가 밑빠진 독에 물 퍼붓듯 쏟아지는 터라 나는 정원의 물이 빠지도록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가량 삽과 곡괭이로 물꼬를 터 주는 작업을 했다. 오후에는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수장(水葬)이라도 당한 듯 어두컴컴한 거실에 무료하게 앉아 공상에 젖어 있었다. 병원 문을 닫은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희의 비디오 테이프 건에다가 이젠 지하실의 쇠톱질--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상쩍은 일들을 주의깊게 탐색할 필요가 있었다. 당분간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쌀, 라면, 통조림 같은 기본적으로 끼니를 때울 것은 있었으므로 식료품 걱정은 없었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자 마침내 하루가 무사히 넘어갔다는 안도감에 젖어들 5시께였다. 차임 벨 소리가 요란스레 났다. 샤워 중이었던 나는 가운을 걸치고 긴장한 채 욕실에서 나왔다. 인터폰을 집어 들자 저음의 귀에 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 원장님 댁이죠?" "네. 그렇소만." "아, 선생님이시군요. 나 인동합니다. 뵐 수 있을까요?" "오늘은 불가능한데요. 다음에 시간을 내기로 합시다." 나는 적당히 핑계를 대어 돌려보낼 심산으로 말했다. "이곳을 찾아오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비에 흠씬 젖었구요. 그럼 은경이 있는 곳이나 알려주시죠?" "그건 나도 모르오." "선생님!" 무슨 소리냐는 외침이었다. "진짜요. 친구 집에 있다는 것만 알아요. 그밖에는 아무 것도 몰라요." "선생님 10분만 아니 5분만 시간을 내주십쇼. 드릴 말씀도 있구요.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간절하게 요구해 왔지만 나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외부인의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데다 도희와 그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의중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이 궁금해 문을 따 주었다. 그가 들어오는 사이 나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반응에 따라 돌려보낼 때를 결정하기 위해 차는 대접하지 않았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소파에 앉아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는 그에게 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은경이가 꾸어간 돈을 갚았나요?" 그가 물어 왔다. "갚았소. 얼마 전에 늦어서 미안하다며 돌려줍디다." "그럼 왜 내게 바로 연락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은경이를 만나면 그 즉시 알려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오! 그때 당신이 보인 시큰둥한 반응을 기억 못하오?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잖소. 게다가 요 며칠 바빠 연락할 경황이 없었소." 그가 언성을 높였으므로 나도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은경이의 거처나 알려주세요." "그건 모른다고 했잖소. 돈을 건네받을 때 자신의 말로는 친구집에 있다고만 했소. 나로서는 그곳의 주소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더 묻지 않았구요." "오늘 병원에 가서 보니까 당분간 수리를 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고 건물 관리인이 그러던데요?" "사실이오. 앞으로 얼마간 진료는 없을 거요." "사정이 그렇다면 은경이도 치료를 받지 못하겠군요. 스스로가 치료를 원한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 질문은 나를 곤혼스럽게 했다. 따로 정은경만 예외를 두어 이곳에서 치료를 나갈 것이라는 얘기를 애인에게 말하기가 망설여진 탓이었다. "글쎄요. 환자가 굳이 원한다면 병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도 치료는 가능하겠죠." "다른 장소라면?" "그거야 환자와 상의할 문제이지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은경이는 두 번 다시 선생님 앞에 나타나지 않겠죠? 꿔간 돈을 돌려주었으니 말이에요." "아마 그럴 거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을 취하라고는 했소만......" "그럼 내가 알아내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겠군요." 인동하는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은경이를 내 나름으로 찾으러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씩 들은 게 있어 하는 말입니다." 뜻밖이었다. 천하의 바람둥이 인동하가 정은경을 찾아다녔다니! 과연 돈 후안의 기질이 있는 사내가 불감증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일까! "그래 들은 게 무엇이죠?" "형부와의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는 잔뜩 긴장하는 눈치였으나 그 사실을 정은경에게서 들은 나로서는 대수로울 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 보았다. "불미스런 일이라뇨?" "형부의 아기를 배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요?" 나의 무덤덤한 반응에 인동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애를 낳진 않았는데 그게 은경이의 정서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불감증도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죠"" 나는 아마추어의 평가에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극히 상식적인 거죠. 자기 친언니의 남편을 유혹한 여자가 죄의식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사후(事後)에 그런 죄의식마저 없었다면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깊이가 없이 양(量)만을 추구하는 인간! 인동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성경 말씀대로 남의 눈의 티는 볼지언정 자기 눈의 가시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내가 정은경의 불감증에 대해 엉뚱하지만 의미 있는 조언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끼며 한편으로 그 우직성에 인간적인 흥미가 끌렸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그 무지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만은 이지적인 예리함이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은경 양이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불륜을 저지른 것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시는군요." "아, 아닙니다. 혐오감이라뇨.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는 거죠." "잘못을 뉘우쳐 용서받을 일이 따로 있죠." 나는 환자에게서는 감히 말 못했을, 심리치유사로서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도덕적 개체의 신분으로 말했다. 무게가 실린 나의 말에 인동하는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인동하 씨는 아직 은경 양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 나에겐 통이 커 흘러내리는 바지 같은 거죠. 난 솔직히 그 흔하게 통용되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기껏해야 그것은 결혼이라는 굴레를 포함하는 것이겠죠." 그다운 대꾸였다. 다음부터 이런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뻔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 나온 이상 그가 은경과 맺은 관계, 나아가서 오로지 섹스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서둘러 보내리라던 당초의 생각은 사라지고 이제 좀 더 붙잡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깜박 잊고 있었던 것처럼 차를 권하자 커피를 달라고 했으므로 내가 그것을 준비할 동안 잠시 얘기가 끊겼다가 두 잔의 커피를 내오고 나서야 대화가 다시 이뤄졌다. "그렇다면 동하 씨가 은경 양을 찾아다닌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애정이 아니라면 그건 뭐죠?" "일종의 친근감이죠. 유대감이라고 해도 좋구요."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아니 적어도 사랑을 이루는 중요한 일부분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정신작용을 말하고 싶어하시는군요.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잊지 못해 매달리고 싶은 심정, 아니면 늘 같이 있어야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 아닌가요?" "당신의 생각은?" "내가 말하는 친밀감이란 그런 게 아녜요. 그것은 육체 접촉이 남긴 흔적일 뿐이죠. 그게 기억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여자를 떠나지 않아요.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격렬한 성적 접촉을 통해서도 기억에 각인되지 않는 여자라면?" "하룻밤 풋사랑으로 끝나고 마는 거죠. 그건 그 여자 곁을 떠나라는 신호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요. 은경 양이 불감증이라는 것을 안 이상 바로 떠날 이유가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에게서 육체적인 기대를 가질 만한 요소가 사라졌을텐데요." "선생님의 물음 속엔 내가 쾌락의 노예일 거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군요. 난 그런 비난과 오해를 늘 받아 왔으니 새삼스럽게 그 문제로 입씨름을 원하진 않아요. 하지만 나름으로 변명은 늘어 놓아야겠군요. 은경이로부터 나에 대해 어떤 비속한 얘기를 전해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수많은 여자 경험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대부분이 한 달 아니 일 주일도 못 채우는 인스턴트 아가씨들이었죠. 그렇긴 하지만 만일 내가 쾌락만을 추구했다면 값싼 창녀들을 놔두고 돈과 시간이 더 드는 여염집 아가씨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겠죠." "같은 본질에다 고상한 호사의 빌로드로 감싼 게 아닌가요?"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요. 난 그처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귀족체질이 아니에요. 경제적으로도 늘 궁핍한 쪽이구요. 굳이 말한다면 젊음에 대한 투자 같은 거죠." "젊음에 대한 투자?" "일종의 특권인 셈이죠. 활기와 생명력이 누리는...... 난 젊음이 무서워 밤마다 여자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거랍니다." "젊음이 무섭다니?" "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젊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발산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젊음은 자기 몸을 뜯어먹고 만다! 난 내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보다는 여자의 알몸을 택하는 거죠." "굳이 에너지를 발산시키고자 한다면 스포츠나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물론 난 충분히 시간을 할애해서 운동을 합니다. 직장에서 일과를 보내고 난 나머지의 대부분을 체력단련에 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운동은 에너지의 발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축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제 정은경이라는 발산의 창구가 없어졌으니 서둘러 새로운 창구를 개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게 여자를 바라보는 인형의 기본적인 시각 아닌가요?" "내 능력을 과대평가하시는군요. 난 섹스 기계가 아니예요. 신문을 찍어 내는 윤전기처럼 지칠 줄 모르고 쉴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에요. 내게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그럼 지금은 휴식시간이란 말인가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시는군요. 선생님과 난 섹스에 대한 관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군요. 우린 출발점이 달라요. 아니면 정반대로 뜀박질을 하고 있던가요." "그래도 누구의 관념이 사회에 이로운가 저울질해 볼 수는 있겠지요." "섹스와 죄의식. 섹스와 사회적 해악--이처럼 섹스를 처음부터 죄많은 무서운 것으로 강요하는 생각을 나는 거부합니다. 섹스를 몰상식한 터부의 영역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자연적이며 긴요한 것이니까요." "나는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소. 섹스에 윤리적 잣대를 갖다댈 수가 없다면 달리 무엇에 대해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논할 수가 있겠소? 난 종교인은 아니지만 섹스에 대해서는 불교의 설법만한 가르침이 없다고 봐요. 승려가 여자를 금하는 것은 성교 그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오. 그리스도의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성욕은 악하고 따라서 그 상징인 성교도 악한 것이에요. 성욕과 성교는 영(靈)에 반대되는 육(肉)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난 그런 사상이나 관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난 오히려 코니처럼 외치고 싶소. 연애의 데모크라시, 육체의 부활을 다오!" "코니가 누구죠?" "'체털레이 부인의 사랑'의 여주인공이오. D.H. 로렌스의 작품이죠." "아아, 그 코니! 과연 그렇군! 그 책은 당신의 정서에 꼭 들어맞을 거요.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나는데, 코니란 여자에게 사랑이란 둔부를 우스꽝스럽게 움직이고 가엾게도 무의미한, 조그많고 축축한 페니스가 시들어 가는 것이었죠. 당신도 그런 생각을 가진 거요?" "적어도 그 책이 섹스가 인간의 모든 접촉 중에서 진정한 유일의 접촉이라고 가르치는 한 나는 대찬성입니다." "하지만 멜러스(남자 주인공)는 지칠 정도로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남자--이를테면 돈 후안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을 비참하다고 보지 않았습니까?" "나도 코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나 돈 후안이 비참한 건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자체에 있다고는 하지 않았소. 그의 불행은 늘 성욕을 활활 타오르는 정점에 주기 때문이라는 거였소. 반면에 멜러스는 코니와 떨어져 있는 동안 강가의 시원한 바람에 몸을 깨끗이 하듯이 조그만한 불꽃 같은 정열을 간직한 채 휴식을 취한다는 입장이었죠. 그는 다만 새로운 성적 타오름을 위해 평화로운 휴식을 취한다는 것 뿐이지 타오름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야말로 심한 착각에 빠져 있는 거요. 소위 말하는 돈 후안이즘이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처나 장애를 성인이 되어서도 극복하지 못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자기를 파괴하는 남성의 포기 외에 다름이 아닌 거요!" "자기의 파괴! 남성의 포기! 왕성한 정력이 어찌 남성의 포기란 말이오?" "닥치는 대로 여자를 섭렵하는 것이 흔히 왕성한 정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해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이 정신의학상의 정리(定理)로 되어 있소. 그 정리란 '성적 관심이나 흥미를 몇 개의 대상물로 가르면 성적 만족의 총량은 줄어든다'는 것이오. 다시 말해 한 여자가 아니라 여러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며 여러 모로 애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남성의 경우, 그의 남성적 능력은 넘치는 것이 아니라 모자란다는 뜻이오. 그건 자신의 능력을 분산시켜 결국 남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거야 선생님이 전문가이시니까 구구한 설을 갖다붙일 수가 있겠지요. 이론에는 내가 질 수밖에요. 정신의학상의 정리가 어떻든 간에 내 만족은 양적인 것이오. 일종의 대량생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죠. 그건 대기업이 수백 수만의 사람들이 입을 같은 옷을 한꺼번에 생산하는 것과 같은 정신이죠. 거기엔 적어도 평등의식이 있어요. 차별성을 두지 않죠. 난 한 여자를 어떤 의미서든 다른 여자보다 사랑한 적이 없소." "은경 양도 당신이 갖고 노는 그 수많은 공기들 중의 하나인 거요?" "좋지 못한 비유이지만 굳이 비유해 말한다면 그렇소." "그런 생각이 여자들에겐 커다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하는 거요?" "난 애정을 얻기 위해 혼인을 빙자하거나 지키지 못할 밀어를 속삭인 적이 없소. 난 내 방식대로 여자와 사귀고 또 헤어질 뿐이오." "아주 편리한 방식이군요. 당신에겐 여자가 마치 볼링의 핀처럼 어느 것 하나 쓰러뜨리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요. 오직 하나의 목적--그것들을 쓰러뜨려 쾌감과 만족을 얻겠다는 생각! 당신의 손에서 공이 떨어져 나갈 때 느껴지는 전율! 그것만이 당신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가치군요." "그렇다면 곽 선생님은 더 무엇을 원하죠? 젊음이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겁니다. 난 싱싱한 여자들을 좋아하고 또 감당할 힘에 넘쳐 있어요. 그들을 쫓아다니는 건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미혼이신 것 같던데 여자 관계를 불결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불결하구 말구요. 성욕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죄악이오." "그게 아니었으면 선생님이나 나나 이렇게 독대(獨對)를 해서 논쟁을 일삼을 수도 없었을 텐데요. 아니 그보다 더 궁금한 점이 있어요. 성욕이 불결하다면 선생님은 이날까지 성경험이 없단 말입니까?" 인동하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바라보며 긴장한 낯빛으로 굳어 있었다. 한동안 숨죽인 침묵이 계속되었다. "역시 말 못하시는군요. 선생님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분이군요. 난 위선자들을 수없이 보아 왔어요. 그들은 나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 턱없이 분노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죠. 하지만 언제나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생활이 탄로날까봐 과민반응을 보이며 수선을 피우는 꼴이 역력해요. 그들은 자신도 나와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지레 주눅이 들어 버린 거죠. 그러며 하는 말들이 순수니 순결이니 하고 떠벌여대는 거죠." 인동하는 노골적으로 나를 빗대어 비아냥거렸다. "성경험이 없다면 어떡하겠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 번두요? 선생님이 그 나이에 한 번두요?" 그러나 인동하는 전혀 믿어 주는 눈빛이 아니었다. 껄껄대며 모욕적으로 웃어젖히더니 그 웃음 끝에 다는 소리가 이랬다. "구약성경 잠언에 세상에 정말 모를 일이 네 가지가 있다 했어요. 첫째는 독수리가 하늘을 지나간 자리, 둘째는 뱀이 바위 위를 기어간 자리, 셋째 배가 바다 가운데를 지나간 자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뭔 줄 압니까?" "......" 나는 무시당했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입을 다물고 노려보고만 있었다. "사내가 젊은 여인을 거쳐간 자리라고 했소. 그런데 나더러 선생님이 숫총각이란 걸 믿으란 말이오?" 인동하는 다시 게걸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나의 모멸감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난기 짙은 청소년처럼 팬티를 무릎 아래로 끌어내리고 아직 수술 전인 내 음경을 노출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멍거지! 포경!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테스나 이화를 욕해도 가슴에 한 점 부끄러움조차 없이 나의 순결을 주장할 수 있는 물적 증거! 그러나 세상 그 누가 불혹의 나이가 가까워 온 사내의 어리광을 받아줄 것인가! 상식의 잣대는 언제나 어중간한 것이다. 그에 반해 진리는 극단적인 것! "선생님이 성교를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알고 싶군요." 내가 끝내 말이 없자 인동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받은 모욕 만큼 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대꾸했다. "그건 사랑과 정반대되는 행위여서 그렇소."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음탕한 남녀관계를 혐오스러워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부의 성행위를 불결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어요. 더구나 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부부의 성행위야말로 사랑이 귀결하는 궁극적인 표현 아닐까요?" "사랑의 절대경이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데 반해 성교는 그 절정의 순간에 에고이즘에 도달하기 때문이오. 수음과 성교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서 시작되지만 그 귀착점은 같소. 하나같이 자기도취에 빠져 버리지요. 여타의 것은 자신의 예민한 감각이 느끼는 전율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거죠.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교를 할 때는 결코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소. 그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쾌감뿐일 테니까. 심지어는 자신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자연력에 탐닉할 뿐이지요." "그 황홀감--고해의 바다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신이 지구상에 내린 축복이 아닐까요?" "무슨 소리! 성이란 천국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맛배기로 보여 준 것이 아니오. 음양의 오묘한 조화니 합기(合氣)니 하고 고상한 말로 수식들을 하지만, 그것은 남성의 입장에서 정복(征服)의 의식을 교묘히 감추려는 술수에 불과해요. 사내들은 성교를 하기 전에 고양이가 쥐를 다루듯 을러대고 불쾌한 장난을 쳐대고 심지어 여자를 겁주면서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이오. 나에게 찾아온 환자 중에는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광경을 보게 되면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었소. 반면, 골빈 여자들은 짐승같은 남성들의 가학성에 기꺼이 몸을 던짐으로써 '쾌락의 축제'의 티킷을 얻으려는 노예근성의 소유자들이오. 어쨌거나 정복의 의식을 떠나서는 성교를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살인과 흡사한 죄악이오. 아니 그보다 더 질이 나쁜 죄악이오. 살인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라면 성교는 얄팍한 노력으로 그에 상응하는 만족을 얻어 내려는 파렴치한 짓이니까요. 나는 누군가가 기꺼이 나서서 세상을 오염시키는 사악한 성욕과 그에 수반하는 모든 저질적인 결과에 과감히 철퇴를 가해야 한다고 믿고 있소." "과감한 철퇴! 무슨 뜻이죠? 나 같은 사람을 국외로 추방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인동하는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난 솔직히 말해 당신 같은 사람들을 혐오하고 있소. 기분 같아서는 쨔르 정권 하의 맹목적인 러시아 군인이 자행했던 것처럼 당신의 항문을 대꼬챙이에 꿰어 15시간 동안 괴로움을 주다가 뻗어 축 늘어진 시신을 소금에 절여 굶주린 늑대들의 배를 채워 주고 싶소." 나는 그에게 모욕감을 느꼈으므로 과장을 곁들여 감정을 자극했다. "대단한 증오심이군요. 성이 그토록 선생님에게 불결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면 은경이 같은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그녀 또한 나 못지 않게 성에 개방적인데요." 인동하는 이제서야 자신이 나를 흥분시켰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얘긴 들어 알고 있소." "그런데도 은경이를 치료할 수 있나요? 극도로 혐오스러운 상대에게 인술을 베풀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믿기가 어렵소." "어려울 거 없어요. 난 공사(公私)를 구별할 줄 아오." "은경이가 밉지만 그녀의 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병이오. 그리고 권할 만한 유일한 병이지. 그 푼수가 아니라 나는 홍역처럼 누구나 그 병을 앓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소." "어허허허허...... 선생님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분이군요." 인동하는 소탈하게 웃는 것 같았지만 소주를 마신 듯이 불쾌해진 표정에서 당혹감과 내심을 은폐하려는 기도를 엿볼 수가 있었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담배를 태워 물었는데 그 또한 의식적으로 여유를 가지려는 가식적인 행동 같았다. 나는 우리의 얘기가 궤도를 벗어나 한참 동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음을 깨달았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으로 인해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은 어이없는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헌데 이 친구는 대체 왜 나를 찾아온 것일까? 단지 은경의 소재지가 궁금했던 것일까?) 서로가 말이 없는 가운데 나는 인동하를 견주어 보았다. 악몽처럼 도희를 엑셀에 태우고 가던 일이 떠올렸다. (도희와는 어떤 관계일까?) "혹시 나도희 양을 아십니까?" 나는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떨려 오는 가슴을 억누르며 물었다. "나도희? 아, 도희 양요. 알다마다요. 병원에서 경리를 보는 아가씨 아닙니까? 며칠 전에는 마산에 다녀오다 요 앞 국도에서 차까지 태워 주었는걸요. 그 아가씨 말로는 이곳 별장에 다녀가는 길이라더군요. 그 때문에 이곳 지리도 알게 됐군요." 긴장한 것에 비해 대답은 너무나 싱거웠다. 내가 지레 공상의 나래를 폈던 것일까. "이런 말을 해서 어떨까 모르겠습니다만 그 아가씨 말로는 곽 선생님이 자기를 싫어한다더군요." 인동하가 이어 말했다. "도희가 그런 말까지 했습니까?]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은 발랄하고 화려한 옷차림이 좋은데 선생님은 그런 옷차림에 극도의 염증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성적인 이미지를 보탠 옷차림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이유가 이해가 가는군요." "......" 나는 콧방귀를 뀌듯 냉연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희, 그 아가씨 당돌하던데요. 내가 은경이의 애인임을 알고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여자 잘 간수하라고 충고까지 하더군요." "마산에 왜 다녀오신 겁니까?] 나는 동문서답처럼 말했다. "인쇄기계가 좋은 게 들어왔다고 해서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죠. 헌데 그건 왜?" "아,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얼른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쉬고 싶군요. 은경 양에 대해 더 하실 말씀이라든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보시죠." "은경이 있는 곳을 진짜 알 수 없는 겁니까?" "그건 두 번이나 말했잖소. 혈서라도 써야 믿겠소?" 그러자 그는 시무룩해졌다. 나는 주말마다 그녀를 치료할 예정이니 토요일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끝내 입밖에 내지 못했다. 치료를 방해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지금 당장은 만난다 해도 인동하가 정은경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인동하에게 정은경을 사랑한다면...... 운운했던 것은 환자의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탓이었다. 형부와의 불륜을 안 이상 당분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게 치료에도 유익할 터였다. 그는 맥빠진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설 듯하다가 도로 주저 앉으며 말했다. "과거에 은경이를 잘 알던 여자 친구한테 이런 말을 들었어요. 글쎄요...... 나로서는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의심이 들었지만...... 하여간 그 친구가 대화중에 은경이가 왜 형부를 유혹했는지 묻더군요.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 형부란 사람이 아버지의 용모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라는 거였소." "형부가 은경 양의 아버지와 꼭 닮았다구요?" "그 아가씨 말로는 그게 콤플렉스의 일종인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선생님이 아직도 치료를 하고 있다면 반드시 일러 주라고 했소. 만일 은경이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형부를 유혹한 것이라면 그녀의 불감증은 아버지에게 고착되어 생겨난 병인지도 모른다면서요. 하지만 이제 소용이 없어졌으니......" 아아,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이제야 인식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하나의 질서 아래 완벽한 짜맞추기가 가능해졌다. 정은경이 형부를 유혹해서 아기까지 배었던 것은 언니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아버지와 꼭 닮은 형부에게서 대리로 만족시키려 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불감증이 생겨난 것도 자기가 형부의 아기를 갖게 되자 언니가 충격을 받고 급기야는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버지(혹은 아버지를 닮은 사람) 외의 사람하고는 아무리 접촉을 해도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없는 증상이 아닐까? 인동하에게서 전해들은 얘기가 사실이라면 불감증의 원인은 90% 이상 밝혀진 셈이다.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부터 '불감증'으로의 비약적인 월장(越藏)의 의문은 깨끗이 씻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불감증의 중핵은 언니에 대한 증오심과 성에 대한 헤픈 끼로 똘똘 포장되어 타인의(심지어 자신에게조차)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되어 왔지만, 기실은 아버지에게 고착되어 있는 자아를 감추기 위한 연막전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가 부나비처럼 사내의 품을 옮겨다닌 것은 인동하처럼 불같은 욕구를 자제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불감증을 은폐하기 위한 철저한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여성적 형식! 전형적인 고착! 나는 수수께끼를 푼 후의 만족한 기분으로 인동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전해 준 메시지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이자 재빨리 내 표정을 읽고는 말해 왔다. "도움이 됐나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만 은경 양을 만날 수 있을지가......" "그야 선생님의 책임은 아니지요." 그러며 인동하는 일어났다. 인동하를 돌려보낸 나는 마침내 정은경의 불감증의 원인을 해명해 냈다는 확신에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인동하를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다닌다는 잡지사 '행복한 여자'로 전화를 걸었다. 가냘픈 여사원의 음성이 들려 왔다. "행복한 여잡니다." "수고 많습니다. 거기 편집하시는 인동하 씨 계십니까?" "잠깐만요." 전화 뒤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외출 중이신데요." "어디에 가셨는지 모르십니까?" "병원에 볼일이 있다고 가셨나 봐요.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다시 걸죠."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일까. 인동하의 신분은 확실해 보였다. 그가 도희를 엑셀에 태워 주게 된 것은 그의 말대로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의심을 거두어 들이며 나는 다시 정은경의 문제에 몰입했다. 만일 그녀가 형부를 유혹한 것이 아버지를 빼닮았기 때문이라면 언니에 대한 증오심과 불감증 사이에 놓인 이해할 수 없는 갭(Gap)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덜게 되지만, 그렇다면 아직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녀는 왜 결국 어렵게 밴 아기를 낙태시켜 버린 것일까? 그녀가 아버지에게 고착되어 관습이나 사회규범에서 일탈한 적나라한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드디어 그 꿈이 현실로 다가드는 순간에 그것을 포기하는 그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의 수치심을 잃은 용기도 아기를 낳는 데까지의 이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아닌 한갖 대리만족으로는 욕구를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런데 끔찍스럽게도 내 상상을 자극한 것은 아버지의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정은경의 욕구는 침실로 뛰어들었다가 어머니의 질투 섞인 꾸지람을 듣는 정도로 형성되지는 않았을 거란 점이었다. 대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떠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오욕감과 외설로 인해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17. 고독한 방 "형부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언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나요?" 나는 정은경이 소파에 누워 편안한 자세를 취하자마자 말했다. 창 밖은 비가 그쳐 있었다. 비좁은 커튼 사이로 낙엽을 잃은 앙상한 가지들이 쌀쌀한 날씨에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요일 오후, 정은경은 어김없이 치료를 받으러 찾아와 주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나타나서는 조용히 나의 요구에 응해 주었는데, 그녀의 생김새가 내 어머니를 닮았다는 야릇한 기분에 압도된 나는 흥분을 진정시키느라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는 여유를 자기고 나서야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내겨다보고 있노라니까 우리의 인연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미신적인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가 병원에 찾아가 대뜸 불감증을 호소한 이후 성가신 일들이 줄을 지어 일어났던 것이다. 효진의 실종으로 말미암은 효숙의 침체, 도희의 알 수 없는 행위, 신승환 형사의 잦은 전화질(어제도 전화를 걸어 와 정은경이 있는 곳을 물었다), 휴업 그리고 엄습해 오는 불안....... "전 언니가 더없이 미웠어요. 언니의 선천적으로 도량이 좁았어요. 절 동생으로 여기기보다는 경쟁상대로만 의식했어요. 우리는 불행하게도 한 번도 친자매로서 따뜻한 기억을 나눈 적이 없어요. 언니가 제게 심어 준 건 열등감과 증오심뿐이에요. 형부를 가로채어 언니에게 제가 받은 이상으로 고통을 안겨 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예상대로 판에 박은 말을 녹음기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언니를 증오했지만 죽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뜻이죠?" 나는 궁금한 것을 차근히 풀어갈 셈이었다. "그,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언니가 죽은 걸 원할 순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텅 빈 방안에서 공명(共鳴)하는 것처럼 들렸다. "언니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부분이 있었다고는 할 수가 없어도 한 가족으로서, 피를 나눈 자매로서 차마...... 하는 마음은 있었던 게로군요?" "글쎄요." "더없이 미운 언니를 잃고 나서 느닷없이 이번엔 상실감을 느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뭐 좋습니다. 자, 안정을 취하시고 내 말을 들어 주세요. 언니에 대한 증오심을 인정한다 해도 불감증이 가족내의 성적인 고착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봤나요?" "아버지에 대한 애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인정한다 해도'라는 것은 내심 그것을 부정한다는 뜻이군요?" 정은경의 센스는 놀라웠다. 토씨 하나에 담긴 의미도 놓치지를 않는 것이다. 나는 인동하에게 들은 얘기를 말할까 하다가 좀더 두고 보기로 했다. "증오심이 아기를 배는 순간까지 가속되다가 한 시점을 고비로 적절한 이유 없이 꺾어지고 마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더구나 은경 양은 죄의식으로 자학하거나 괴로움으로 몸부림친 적이 없다고 했잖소. 대체 무엇이 브레이크의 역할을 해서 증오심을 없애 버렸는지 수수께끼란 말이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애초부터 그 증오심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요?" "어, 없었던 것이라뇨?"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정을 달리 해 보기로 합시다. 불감증이 언니가 죽은 충격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고 형부를 유혹한 것도 언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기실은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요?" "아, 아버지 때문이라구요...... 선생님은 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거죠?"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왔다. "아버지와 은경 양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면 뭐든지요." 경악으로 일그러진 은경의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영리하게도 금세 자신이 굳게 숨겨 왔던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했다.' "겨, 결국 선생님은 알아내시고 말았군요." "그것을 털어놓지 않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우리? 허울 좋은 껍데기 같은 말이에요. 선생님은 불감증의 원인을 알아내는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 거예요." "두려워하시는군요." "물론이에요. 전 두려워요. 그런 걸 저더러 어쩌란 말이요." 은경은 난데없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제 보니 그녀는 불감증의 원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타인으로부터 지적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으리라.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죠?"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물어 왔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지만 결정적인 얘기는 인동하 씨한테 들었어요." "동하 씨가요?" "놀랄 거 없어요. 은경 양의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었소. 아마 은경 양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수소문을 하고 다녔던 모양이오." "믿기 어려워요." "나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소." "그 인간이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불감증인 것을 알자마자 정나미가 떨어졌을 사람이에요." 그녀의 부정적인 생각을 단순히 인동하의 사랑을 들먹여 무마할 순 없었다. 솔직히 나는 인동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내게 이런 말을 합디다. 은경 양이 형부를 유혹한 것은 형부가 아버지를 빼닮았기 때문이라구요. 그 얘기는 다시 말해......." "그만!" 은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요! 아버지 얘긴 집어치워요! 제, 제발......." "은경 양, 흥분하지 말아요. 우린 이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병원에 첫 발을 내디딜 때의 용기를 상기하세요. 이런 순간이 오고 말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 못한 건 아니잖습니까. 자, 진정하세요. 잠깐만요." 나는 그녀가 일어서려는 것을 만류한 뒤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브랜디를 한 잔 가져 왔다. 그녀는 하이볼 반 크기의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격렬하게 기침을 해댔다. 나는 등을 두드려 주며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격분해 날뛰지는 않았으나 생기를 잃고 허탈해진 표정이었다. "은경 양! 정신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어 봐요.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거예요. 고통스럽더라도 이겨 내야 합니다. 이 고비를 넘기면 불감증은 치유될 수가 있어요. 용기를 내세요. 두려움을 떨치세요. 과거의 수치스런 기억에 발목이 잡혀 평생을 고민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 차마 입에 담기가......." "브랜디를 한 잔 갖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냉수나 줘요." 얼음물을 마시고도 은경은 5분여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나서도 응해 올 기마가 없으면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윽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선생님에게 속인 게 한 가지 있어요. 아니 속였다기보다는 묻지 않길래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가빠진 호흡을 조절하는 그녀를 응시하며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희 엄만 계모였어요. 친엄마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자궁암으로 돌아가신 후 1년 뒤 아버지가 새장가를 드신 거죠. 계모에겐 손윗딸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미워한 바로 그 언니예요." "계모와 사이가 나빴나요?" "좋진 않았어요. 전 어릴 때라 친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쉽게 떨칠 수 없었고 아마 늘 응석을 부렸던가 봐요. 하지만 계모도 팥쥐 엄마만큼 아니었지만 그리 너그러운 분은 아니셨어요. 제가 투정을 부리면 아버지에게 고해바쳐 꾸지람을 듣게 만들었으니까요." "아버지 쪽에서는 어땠나요? 특별히 계모의 역성을 든다든가 하시지는 않았나요?" "계모의 입장만 두둔하시지는 않았어요. 다만......." 은경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가 말했다. "아마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때 계모는 신춘맞이 의상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2박 3일 동안 일본 도쿄에 가셨어요. 그날 밤 전 언니와 함께 잠을 잤어요. 따로 방이 있었지만 서로 서먹서먹해질까봐 잠만을 같은 방에서 자곤 했었죠. 적어도 그때까진 투닥대진 않았으니까요. 한 새벽 3시쯤이었을 거예요. 곤한 잠에 빠져 있는데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어요...... 전 꿈결인가 싶어 몽롱해 있다가 재차 또렷이 들려오는 소리에 그것이 언니가 내는 신음소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아, 그런데...... 그것은 독감이나 신열로 인해 반의식의 수면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맥빠진 음성이 아니었어요. 아직 봉우리가 채 여물지 않은 제 어린 가슴으로도 그것은 흥분과 쾌락으로 고동치는, 적어도 일방적으로 당하는 여자의 몸부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저는 본능적으로 '언니!'라고 부르며 돌아누우려다가 언니를 짓누르는 검은 물체에 흡칫 놀라며 움츠러들고 말았어요. 어쩌면 좋을까요! 언니를 괴롭히는 그 검은 물체는 아버지였던 거예요. 저는 혀를 깨물며 귀를 막았어요. 지옥에서 아우성치는 듯한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서 그 행위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숨을 죽이고 온몸이 빳빳이 굳은 채 겨울비를 흠뻑 맞은 생쥐처럼 떨고 있었어요. 그러나 안 들으려고 저항하면서 저 자신에게 의식을 집중하면 할수록 그 소리는 고막을 찢으며 파고들었어요. 그리고 어느 틈엔지 끔찍한 비명 같은 그 소리가 솜사탕 같은 달콤함으로 변해 저를 매혹하는 것이었어요. 저의 내부에서 믿을 수 없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변화가 생겨났던 거예요. 아아, 저는 더러운 창녀의 본성을 타고났는지도 몰라요! 후처의 딸을 욕보일 수 있는 아버지의 음탕함! 그것이야말로 제핏줄로 흘러들어 성욕을 줄기차게 지배하는 무섭고도 두려운 힘이 되었던 것이에요. 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선뜻 위로의 말을 건네기에는 그녀의 기억에 사무친 피해의식이 너무나 커 보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호흡이 다소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왜 언니는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않았을까요? 은경 양이 옆에 있었으니까 소리를 쳤으면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텐데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입을 수건 같은 것으로 봉쇄당했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저항할 수가 없었는지......." "그날 밤 이후 언니의 생활을 어땠나요?" "한동안은 우울해 보였지만 그 사실을 엄마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았나 봐요. 그 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지는 않았으니까요." "은경 양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언니가 눈치 챘나요?" "아마 몰랐을 거예요. 제가 먼저 언니에게 그런 언질이나 눈총을 준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날 밤의 경험이 은경 양에게 준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죠?" "아아, 그것은......." 그녀는 괴로운 듯 풍성한 머리채를 이마 뒤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최초의 성에 대한 두려움도 매혹적인 경험이었어요. 전 그날 제2의 성이라 일컫는 여성으로 태어난 거예요. 내 피 속에 자극을 받으면 쾌감을 느끼며 꿈틀대는 무엇이 있다는 자각! 마침내 음핵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는 그 엄청난 경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에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그게 무슨 뜻이죠?" "수치스럽게도 그 얼마 후 오나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헐떡이는 숨결을 떠올리지 않고는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 한편으로 성욕과 성행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고 더러운 것, 너무나 외설적이어서 감히 손댈 수 없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커가면서 그런 의식이 늘 잠재돼 있었나요?" "그랬어요. 그 양가감정이 내부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었어요. 쾌감과 만족은 그날 밤의 극히 은밀한 기억 속에서만이 이뤄지고 겉으로는 남학생의 여드름 하나, 눈짓 한 번-----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에는 과잉적인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남학생을 사귄 적이 없었나요?" "없었어요. 형부가 첫남자였어요." "왜 남자를 사귀지 않았죠? 여고 시절이야 부모님의 눈길이 무서워 그럴 수도 있지만 대학생 때는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요." "불결했어요. 연애란 시적으로 승화된 성욕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형부는 그런 불결한 대상에서 예외가 된 거죠? 내가 동하 씨에게 들은 대로 형부가 아버지를 빼닮았기 때문이었나요?" "......." 그녀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은경 양은 아버지를 원했던 것이로군요. 문제의 날 밤에 은경 양의 뜨거운 피가 느꼈던 그 기억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대상을 형부에게서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구요." "......." 묵묵부답이다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친다. 나는 끝 모를 동정과 비감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미진한 점을 캐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형부의 아기를 가졌던 것도 아버지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 "그렇다면 은경 양은 아버지에 대해 신화적 악의(神話的 惡意)를 품고 있었던 셈이로군요. 은경 양의 내부에서 성에 대한 관념이 분열을 일으켰듯이 아버지에 대한 태도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가지 감정----쾌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내라는 것과 더럽고 부도덕한 아버지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던 거예요. 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적인 순결관념을 형성시켜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와도 성적인 흥분을 공유할 수 없다는 불감증을 낳았고, 후자는 아버지의 아기를 가짐으로써 아버지보다 더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드러내는 파괴의 감정 속에서 자학적인 쾌감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마침 아버지를 닮은 형부에게로 그런 두 가지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던 거죠. 아버지가 형부로 대치되었지만 빼닮은 모습에서 여전히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순결이 살아남았고, 세상의 관습적인 눈으로 보아서는 형부를 가로채는 몸서리쳐지는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자신을 파멸시키는 복수를 아버지에게 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끊임없는 남성편력에서 성적인 오르가즘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순결관념이 해소되지 않은 채 잠재해 있었던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언니에 대한 증오심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날 밤의 언니에게 해 준 것처럼 대해 주지 않았다는 질투심의 발로였군요." 짜릿한 희열에 들떠 나는 불감증의 원인을 완벽히 규명해 낸 데 스스로 감격해마지 않았다. 비록 인동하의 귀띔에 힘입은 바가 컸지만 정은경의 침묵의 시인을 얻자 환자가 찾으려던 해답을 얻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이번에도 기쁨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에 직업적인 감격이 솟구쳤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왜 그녀는 느닷없이 형부의 아기를 낙태시킨 것일까? 그녀 스스로는 형부가 직접 둘 사이의 불륜을 언니에게 고백한다는 조건으로 낙태에 동의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형부를 유혹한 것이 언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 대답은 무의미해질 뿐더러 아마도 그녀가 꾸며낸 거짓부렁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백성사를 마친 후의 천주요 신자차럼 약간은 허탈하고 창백한 안색으로 굳어 있는 은경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형부의 아기를 낳지 않고 지운 거죠? 대리만족으로는 욕구를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의 엽색행각은 그 후에는 계속되어 끝내 집안을 파멸시키고야 말았어요. 아버지는 계모와 이혼을 하고 빈털털이로 내쫓기 위해 용인(傭人)을 써서 계모에게 성폭행을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술에 만취되어 들어오는 날이면 계모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셨죠. '창녀 같은 년!' 꼴도 보기 싫어! 썩 꺼지라구!' 그리고 주사를 뜯어말리는 저에게도 계모처럼 헤프게 굴면 창녀라고 부르겠다고 호통을 치셨어요. 하지만 정작 창녀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한 건 아버지였어요.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된 건 술집마담의 꾐에 빠졌던 탓이에요. 수모를 견디지 못한 계모가 가출한 이튿날 아버지는 요부의 끼가 온몸에 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전 아버지의 본성이 입술 위에서 번들거리는 장어기름처럼 게걸스럽고 탐욕스럽게 빛나는 음험함인 것을 알았어요. 아아, 저는 그런 아버지의 숨결이 제 알몸에 닿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거예요. 전 제멋대로 상상을 부풀려서 언젠가는 아버지가 언니에게 한 것처럼 저에게도...... 하지만 그게 바로 허망한 환상임이 드러난 거예요. 아버지는 천박한 창녀에게서나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저급한 사람이었던 것이에요. 그러자 제 몸 속에서 꿈틀대는 핏덩이를 지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설령 상징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 아이에게 더러운 아버지의 피를 물려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전 그 아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낙태 후에 왜 불감증이 치료되지 않았을까요? 은경 양은 스스로 아버지의 마법에서 풀려났는데도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이후로 저 자신이 창녀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스러져 가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눈물을 머금고 두 다리를 벌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섹스를 즐기려는 욕구로 불타올라 기꺼이 사내의 페니스를 찾아나섰던 거예요. 그러나 그 음란한 창녀의 끼----얼마나 끔찍스러운 것인지! 선생님은 이런 저를 저주하시겠죠?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선생님이 얼마나 증오하고 또 가혹하리만치 경멸하는 시선을 던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절 죽이고 싶지 않아요?" "방금 뭐라고 했소?" 나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절 죽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왜 그런 섬뜩한 소리를! 피로해 보이는군요. 소파에 좀 누워요." 그러고 보니 얘기가 흠뻑 빠져 들어 그녀가 앉아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전 선생님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낄 수가 있어요. 제가 마광수 교수의 책을 읽고 철새처럼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옮겨 다니고 음탕한 얘기를 서슴지 않고...... 전 선생님이 살의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잖아요." "은경 양! 진정해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럼 방금 한 말이 진담이란 말인가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 내가 은경 양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순결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학하시는군요?" "자학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나를 노려보는 은경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환자의 온순함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어떤 사실?" "선생님의 과거요?" "순결하지 못한 여자들을 죽이셨잖아요." "듣자하니까 말이 지나치군!"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언성을 높였다. "은경 양, 오늘은 이만 끝내는 게 좋겠어. 이제 불감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까 다음에 한 번 더 만나 정리를 하자구. 병증은 마음먹기에 따라 곧 치료될 것으로 확신해." "제 물음을 회피하시는군요?" "왜 자꾸 이러지?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지?" "난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빈말에다 나를 <당신>이라 부른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오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젠장! 어디 말해 보라구!"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지! 당신의 유토피아가 거기 있잖아." "허튼소리 집어치워!"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당신 어머니가 창녀만 아니었어도 당신이 비정상적인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야." "그 말 취소해!" "취소 못해!" 우리는 동시에 벌떡 일어나 상대방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야!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를 모독하는 건 못 참아!"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부들부들 떨리던 손끝은 그 말에 가까스로 자제력을 발휘했다. 은경은 자신을 죽여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함정임을 직감했다. "은경이의 정체는 뭐지? 경찰인가?" "정숙이 언니의 동생이야." "정숙이가 누구지?" "당신이 죽인 여자 중의 하나야. 달성공원에서 내가 YKMES가 무슨 뜻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그건 바로 '네가 내 언니를 죽였어(You killde elder sister)'의 영문 이니셜이었어. 기억할지 모르지만 언니는 작년 이맘때쯤 당신 밑에서 약 한 달 간 간호사를 노릇을 했었지. 하나뿐인 언니가 서울에서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난 유학까지 포기하고 귀국해 지난 1년 동안 당신을 주시해 왔어." "오호, 그랬었군! 네 년이 보낸 편지는 나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군!" 나는 목젖에 가시가 걸린 듯한 소리를 내며 클클거렸다. 그 음산한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지 은경은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당신은 살인마야!" "거짓말 마!" "증거를 대 봐." "농유산과 중크롬산칼리로 납치한 여자들을 녹여 버렸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 공업약품은 가죽을 무두질할 때 쓰인다더군. 두 약품이 혼합되면 인간의 몸체를 완전히 녹여 버릴 정도로 강력한 용해력을 발휘하고 왜, 아닌가?" "그거 재미있군. 그래서?" "지하실의 탱크의 납치한 아가씨들을 쳐 좋고 뼈다귀만 남은 어머니 관 앞에서 신관처럼 맹세를 외쳤겠지. 나의 어머니시여! 악인의 손에서 나를 구해 주시고, 흉악하고 약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하소서. 어머니, 바라느니 당신뿐이오. 어려서부터 믿으니 어머니 당신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뱃속에 있을때부터 당신의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죽었다고 이 몸을 버리지 마시옵시고 부디 영원히 나를 지켜 주옵서소. 이자들을 당신께 바치는 제물이옵니다. 또한 이자들은 창녀처럼 엉큼한 계집들이라 죽어 마땅합니다. 분수를 모르고 사내들의 음심을 발동시켜서 세상의 도덕을 파괴하고 윤리의 혼란을 부채질한 인간 망종들입니다. 기꺼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당신이 가는 길에 산화(散花)가 되게 하옵소서." "지하실의 자물쇠 고리를 쇠톱으로 긁어 놓은 게 너였구나! 교활한 년! 죽여 버릴 테야!" 나는 분노로 치가 다 떨렸지만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용케도 당신은 증거물을 깨끗이 치웠더군. 하지만 완벽할 순 없을테지. 당신이 깨닫지 못한 어느 구석에서 비명에 갔을 여자들의 신분을 밝혀 줄 만한 반지 하나, 귀걸이 한짝 아니 찢어진 옷소매 자락이라도 찾아낼 수 있겠지." "신승환 형사와 공모한 일인가?" "그래. 그 형사가 나를 뒤쫓는다는 것은 거짓이야. 순전히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사기극이었지. 그뿐만이 아니야. 나의 불감증 그리고 인동하가 애인이라는 것도. 물론 잡지사 <행복한 여자>에도 우리 동지를 심어 놨었지.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정신과 의사로서도 형편없더군. 인동하 씨가 내 형부와 아버지가 닮았다는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불감증의 원인을 밝혀 내지도 못했을 거야." 은경은 비웃고 있었다. "그, 그게 모두 시나리오였단 말인가?"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으나 나는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그래, 당신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짠 시나리오였어." "도, 도희는?" "도희는 여자 경찰이야." "그녀는 순전히 미끼였군." "우린 당신이 짙은 화장을 한 그녀를 죽이길 바랐지. 그게 바로 당신의 습성이니까.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교묘히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당신은 도희를 건드리지 않았어. 도희가 당신에게 몇 번이나 야한 화장을 하지 말라고 욕을 얻어먹고도 철면피처럼 굴었던 것은 당신이 공격해 오길 바랐던 거지. 당신의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예민했던 건 인정해. 도희가 공작비둘기를 죽인 테이프를 보냈는데도 당신은 그녀를 죽이려 들지 않았으니까. 거기서 우리는 당신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눈치 챘지. 물론 병원의 집기들을 이곳으로 날아오던 날 도희가 당신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도희는 내가 그날 자기를 죽일까봐 정말 두려웠던 게로군. 뒤를 힐끔거리며 줄행랑을 치던 꼴이란!" 나는 통쾌해져서 웃어젖혔다. "지하실을 뒤져 보고 나서도 나를 체포하지 못하는 걸 보니 증거를 수집하지 못한 게 분명해." 은경은 매섭게 나를 노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유쾌해져서 빈정거렸다. "왜, 지하실에서 실종된 아가씨들의 주민등록증이라도 나왔나?" "아냐, 불행히도 없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어 있지 않았다. "그건 불행이 아니라 다행이지." "왜 어머니를 땅에 묻지 않았지?" "알 거 없어." "어머니조차 당신 손으로 죽인 게 아닌가?" "닥쳐! 아가리를 찢어 버릴 테야! 우린 어머닌 병으로 죽었어." "무슨 병이었지?" "몰라도 돼!" "어머니가 창녀여서 죽인 게 아냐?" "다시 한 번 그 더러운 입을 놀리면......." 나는 두 손을 그러모아 은경의 턱밑으로 가져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창 밖 어디선가에서 그녀의 동료들이 내가 정은경을 죽이려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위기감이 나의 행동에 제동을 건 것이다. 피하기는커녕 움츠러들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서 올가미를 씌우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넌 내가 죽여 주길 바라고 있겠지?" "그래, 날 죽여 보라구. 어서, 죽여 봐! 수많은 여자들의 피로 물든 그 잔인한 손으로 어서 목을 졸라 보라구!" "미안하지만 나는 맨손은 안 써." 나는 오른손 인지를 와이퍼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칼을 쓰나?" "면돗날." "그것으로 희생된 사람이 몇 명이지? 11명 아님 12명?" "네 마음대로 상상해."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소아병적인 모친애착에서 생겨난 결과겠지?" "네가 모친애착에 대해 뭘 안다고 떠벌여대는 거야?" "당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연구해 보면 쉽게 도달되는 결론이야. 당신은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성적 애착의 노예인 거야. 어머니에게 발목이 묶인 나머지 어떤 여자를 대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여자가 없으며, 모두 2류의 대용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지. 그 애착은 반은 의존심이고 반은 적의(敵意)인 거야. 당신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 양수에서 헤엄치며 절대적인 안전함을 느끼고 싶은 욕구와 동시에 어머니에게 신경증적인 공포를 느껴 죽이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당신은 여자들만을 골라 죽임으로써 어머니에게로 향한 적의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거지. 어머니와 맺은 유대----말이 좋아 유대지 그 본질은 탯줄로 연결된 근친적 공생 내지는 일체감을 잃지 않기 위한 유아적인 발버둥질에 불과해. 당신은 아직 유아야. 엄마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아장아장 걸을 수 있는 두 살짜리 코흘리개!" 나는 귀가 멍멍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음성이 물웅덩이의 대롱에서 바람이 빠져 나오는 소리같이 들려 왔다. "더 말해 줄까. 당신의 신경증적인 쇠퇴가 보이는 가장 드라마틱한 증상은 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나르시시스트의 열망이야! 그 물은 당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자궁의 양수인 거야!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지. 자궁과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갈망은 또한 죽음과 파괴에 대한 갈망이니까. 당신이 어머니의 수의(壽衣)로 빨간 레인코트를 택한 것은 피(=빨간색=죽음)와 물(=양수=자궁)에 대한 상징을 암시하고 싶어서였겠지?" "그러고 보니 처음 찾아왔을 때의 옷차림이 우연이 아니었군?" 나는 교활함에 치가 떨려 말했다. "의도적으로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하실의 당신 어머니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지는 몰랐어." "당신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아니 내 어머니를 닮았다는 인상을 느낀 것도 조작이었나?" "고도의 메이크업의 승리지. 당신 어머니의 사진을 구해 비슷하게 화장을 한 거야. 우린 당신이 어머니를 상기하기를 바랬으니까." "하지만 결국 당신들은 패한 셈이군. 별장을 수색하고도 원하는 것을 못 얻었으니까. 그렇담 오늘의 이 느닷없는 고백은 백기를 든다는 뜻인가?" "천만에. 승부를 논하기에는 아직 일러. 우리는 정부기관에 당신의 정신상태 감정을 의뢰할 셈이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의사면허가 취소돼서 지금처럼 일시휴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병원 문을 닫아 걸어야 할 테니까. 잘됐지 뭐야!" "쉽게 그렇게 될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왜 그렇게 순결에 병적인 애착을 보이는 거지?" "마음속에 성욕이라는 추악한 송장더미를 품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어머니가 창녀였기 때문인가?" "아가리 닥쳐! 어머니를 들먹이지 마!" "당신이 학비가 비싼 의대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오늘날 병원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어머니가 몸을 팔아 돈을 댔기 때문이 아니었나? 아마 당신의 고결한 엘리트주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겠지." "못 참아!" 나는 기어이 은경의 목에 손을 가져가 힘을 가했다. 손을 써보기는 처음이었다. "자, 좀더......애를 써 보라구......젖먹던 힘까지......." 그녀는 저항은 고사하고 기도가 막혀 헐떡거리면서도 나를 자극했다. 역시 그녀의 속셈은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악력을 풀며 물러났다. 그녀는 캑캑거리며 목을 어루만졌다. 이상한 것은 원군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신 친구들은 다들 어디 간 거지?" "염려 마. 당신이 나를 살해하기 전까지는 나타날 테니까." "대단한 아가씨야! 이렇게 겁없이 아가씨를 죽이는 맛은 색다를 거야." "미친놈! 너야말로 곧 교수대의 개목걸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맛을 볼 거야." "약이 오를만도 하겠는걸. 하지만 내가 깜쪽같이 속은 것에 비하면 유도 아니지. 아아, 잊었군! 당신들도 한동안은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말야." "효진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우린 당신이 효진 양과 안면이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그녀를 찾기 위해 효숙이와 K대 음악과 숲 속을 함께 헤매다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지. 도희가 대일밴드를 사다 주며 당신의 목에 난 상처가 효진의 손톱자국이라는 것을 짐작만 했어도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겠지. 그 천진난만한 아가씨를 죽인 것은 야밤에 남학생과 데이트를 해서였나?" "천진난만? 그 단어를 그렇게 적용하는지는 몰랐군. 나에겐 무척 어려운 뜻이야." "그 아가씬 이제 겨우 신입생이야! 삼수를 했지만 불과 스물 한 살의 나이야." "타락은 나이와 상관없어." "그녀도 역시 녹여 버렸겠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리한 말은 하나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들은 오늘을 디데이로 정한 것 같았다. 아까 목을 조른 것은 실수였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감시를 하고 있을 동료들이 놀라 뛰어들지 않는 걸 보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웬만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더 이상 뭘 감추려 들지?" "왜 안달이 나나?" "당신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우린 차선책이 있어." 은경은 현관 입구의 옷걸이로 걸어가더니 숄더 백에서 두툼한 봉지를 하나 꺼내 가지고 와서 내게 던져 주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가슴에 부딪힌 다음 발밑에 떨어졌다. "뭐야?" "궁금하면 직접 들여다보라구. 사진이야." "현혹하려 들지 마." "내일 주요 일간지에 그 사진들이 실릴 거야. 그러면 당신은 전국적인 스타가 될 거야. 잘하면 해외 토픽감이 될지도 모르지." 나는 봉투를 집어 들고 사진들을 꺼냈다. 아아, 해골과 마네킹! 지하실의 내부를 돌아가며 속속들이 찍어놓은 것들이었다.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사진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짓이야! 당신들은 내 내부를 들여다볼 권리가 없어. 그건 나만의 것이야!" "애꿎은 아가씨들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피를 말릴 셈이군. 허나, 난 그 수에 넘어가지 않아!" "이걸 보라구!" 은경은 왼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 "이 새끼손가락에 낀 도금반지가 누구 것인지 알아? 효진 양이 끼고 있던 거야. 더욱 재밌는 것은 이게 이 별장 지하실에서 나왔다는 거야." "헛소리 마! 그 여학생은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어." "실토해도 이젠 늦었어. 신형사, 도희, 효숙 양 그리고 다른 요원들도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어.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당신은 꼼짝없이 걸려든 거야. 올가미를 벗어날 순 없어. 우린 당신이 범행을 자백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아. 당신의 정신상태는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무용지물이야. 더 이상 해악을 끼치게 할 순 없어. 모든 것을 당신이 행한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당신을 자유롭게 놔둘 수가 없단 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린 밀어붙일 거야. 그 사진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농유산과 중크롬산칼리로 10여 명의 아가씨들을 살해한 최대의 살인마 용의자임을 밝히고 이 반지가 그 증거물임을 주장해 보는 거야. 물론 능력 있는 변호사를 당신이 사들인다면 기소에서 우리가 패배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재판이 있는 동안 당신의 과거,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와 심리 상태가 낱낱이 까발려져서 매스컴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겠지. 결국 당신은 어떤 방슥으로든지 상처를 입게 되고 말 거야. 상상만으로도 당신이 그때 가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재미있어지는군. 자, 오늘 밤은 당신이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는데 나와 이렇게 욕지기 나는 입씨름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잖아. 어머니의 양수에 빠져 죽고 싶어하는 사나이! 자기연민에 몸부림치는 나르시시스트여! 안녕! 우리 팀이 내일 들이닥칠 거야!" 은경은 돌아서서 옷걸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엷은 노란 빛의 실크 블라우스를 걸친 등판이 무척 넓다고 생각했다. 넓다. 그곳은 참으로 넓다! 그러나 나는 넓은 곳을 싫어하지. 좁고 어두운 태아처럼 발을 턱밑으로 끌어당기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는 곳! 거기, 조용한 자궁 속, 어머니가 나를 잠재워 주시던 곳! 그곳을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들여다보게 할 수는 없다. 나를 지탱하는 것! 나만의 비밀! 유일한 절대적 관점! 그것들을 수치스럽게 할 수는 없다. 은경은 내 존재를 묵살한 채 카키색 바바리를 걸쳐 입고 있었다. 나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싱크대의 아랫문을 열자 칼 두 자구가 꽂혀 있었다. 식칼과 과도, 나는 과도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까지 스텐인리스스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묵직한 중량감, 그것은 살의의 느낌이었다. 나는 현관으로 쫓아나왔다. 감청색 하이힐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던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흰자위가 많아지는 눈동자, 공포의 빛이 스쳐간다. 사랑스런 표정이다. 익숙해진 죽음의 표정이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내 손에 운명을 맡긴 여자들은 언제나 안면근육에 과도한 에너지를 집중했다. 거기엔 살아온 모든 표정이 들어 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가교가 놓여 있는 것이다. 블라우스 앞섶 사이로 우유빛 목줄기가 보였다. 아직 처녀의 미세한 주름은 좋은 과녁이 되었다. 주름은 세 개였는데 나는 제일 아랫것을 택했다. 칼끝에 잘린 기도는 단숨에 호흡불량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야앗!" 나는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동시에 공기가 터지는 듯한 총성이 귀를 찢을 듯이 파고 들었다....... 나는 2주 간의 총상치료를 받은 뒤 특별감호소로 이송되었다. 낡은 침대와 변기가 딸린 조그만 독방으로 기소의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그곳에 있게 될 거라는 귀띔이었는데, 나에게는 변호사 선임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신형사가 찾아와 12명의 여자 명단과 사진을 내보이며 죽인 아가씨들을 지적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나는 냉담하게 거부하며 돌려보냈다. 지금 와서 그 아가씨들을 솎아낸다고 달라질 게 뭐람! 나는 형사의 사후약방문식의 일처리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그가 돌아간 후 썰렁한 방에 홀로 남은 나는 내가 저질러 온 완전범죄를 은근히 과시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행한 짓이라 이젠 기억 속에서조차 상당 부분 쇠퇴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한 건 한 건을 해치울 때마다 짜릿한 전율로 온몸이 팽팽히 긴장되던 순간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나의 전능한 지배자인 것처럼, 그 아가씨들의 목숨도 나의 연약한 두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희열을 맛보는 것이 내가 살아온 유일한 보람이었다. 그것은 지배와 파괴의 논리라고 비난을받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무릇 생명체란 그런 논리의 조종을 받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든, 나는 살인을 할 때마다 극히 조심스럽고 계획성 있게 일을 처리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설을 나만은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희생양을 선정할 때 나는 철저히 뒷조사를 했다. 성적 타락의 징후를 드러낸 아가씨들 중에 뒷배경이 든든하지 못해 실종 후에도 대충 형식적인 수사를 마치고 나면 흐지부지되고 말 인물들만을 골라온 것이다. 거기다가 이중장치로 농유산과 중크롬산칼리가 완전이 녹여 내지 못한 뼈는 항상 집(나는 서울에서도 변두리의 외떨어진 곳에서만 살았다)의 소각장에서 태워 안정을 꾀했다. 그래도 불안할 땐 검은 잿더미로 변질된 찌꺼기를 땅속 깊숙이 파묻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으로 보아선 효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가지 앞서의 모둔 치밀한 살인과 차이가 있다면 효진을 죽인 것은 우연한 만남이 부른 흥분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그날, 그러니까 술의 힘을 빌어 도희에게 해고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호프집 앞에서 헤어진 후 나는 취기를 견디지 못해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호흡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별장까지 차를 몰고 가야 됐기에 알코올의 열기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0분쯤 지나는 동안 나는 두 번의 오버이트를 하고 나서 간신히 정신을 가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이 안돼 우유를 하나 사 마신 후 이번에는 약국으로 맥소롱과 간장약을 사러 갔다. 효진을 만난 것은 그곳에서였다. 그녀는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끝내고 밤늦게 집으로 귀가하던 중 졸음을 막는 타이밍이라는 약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내가 먼저 효숙이를 많이 닮은 그녀를 알아봤다. "아가씬, 효진 양 아닌가?" "누구시죠?" 처음엔 경계심을 드러내다가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지난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금세 친절하게 나왔다. "언니에게 선생님 얘기 이따금 들었어요." "그래? 그거 평판이 나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웬걸요. 매사에 열심이사라고......." "그렇담, 다행이고." 나는 그녀의 말이 형삭적이란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무렵 효숙이와의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으므로 적어도 동생에게 좋은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약국을 나왔다. "술을 과하게 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가 헤어지기 위해 의미없는 인사로서 던진 말이었다. "차 있는 데까지만 좀 바래다 주겠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에게 살의를 품고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버스를 타시려구요?" "아니, 내 차로 가려구. 학교 후문께에 주차해 놨으니까 여기서 얼마 안돼." "그래됴, 그럼. 그리루 돌아가도 저희 아파트까지 5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요."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별로 얘기도 없이 걸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화장품 냄새만이 짙게 내 후각을 자극했다. 그것은 백합의 향기 같았는데, 내게 그녀가 천박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한 자극이었다. 더군다나 음악관 숲 앞에서 보여 준 그녀의 첫인상은 암내를 풍기고 다니는 발정기의 사슴과 같은 것이었다. 페팅, 아가씨의 거친 숨소리, 어둠에 잠긴 숲 속...... 어딘지 퇴폐적인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내 상상 안으로 흘러들었다. 주택가 골목에 주차해 둔 흑색 프린스가 보이기 사작했을 때 별안간 내 가슴 밑바닥에서 살의가 솟아났다. 그러자 술기운도 일시에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효진 양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는데. 내 돌아올 때를 위해 택시비를 줄 테니까 복잡한 도심을 빠져 나갈 때까지만 동석해 주겠어? 아무래도 혼자서는 운전을 감당 못할 것 같아." "꽤 늦었는데......언니한테 잔소리를 들을텐데......."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걱전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언니에게 연락을 하지. 언니도 이해해 줄 거야." "댁이 어디신데요?" "집은 교왼데 거기까지는 필요 없어. 도심은 송현동까지니까 한 10분만 동석해 주면 돼. 효진 양은 거기서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 되구." 나는 얼른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자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혹시 음주단속이라도 있으면......." 시동을 걸었을 때 그녀가 군소리를 덧붙였으나 나는 그 말을 묵살한 채 엑셀을 밟았다. 한참을 차로 달리노라니까 약기운이 효과를 나타내는데다 긴장감 때문에 취기로 침침했던 의식은 차츰 맑아졌다. 완전히 정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취기가 결행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도심을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전 그만 내려야겠어요." "어허, 이거 어쩌지. 벌써 이렇게까지 왔나? 내가 그만 깜박했군. 아무래도 차를 되돌려야겠어." "아니에요. 그냥 내릴게요." "아, 아냐.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금방 돌려서 택시를 쉽게 잡을 수 있는 곳까지 바래다 줄께." 효진을 안심시킨 나는 국도를 벗어나 한적한 샛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적이 끊어진 곳에 차를 돌리자마자 세웠다. 간간이 차창 밖으로 국도를 빠르게 지나치는 차량의 불빛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엔진이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 나는 그녀 앞으로 몸을 기울여 글로우브박스에서 뭔가를 찾느척하다가 면돗날을 인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몸을 빼내는 순간 내 오른손은 그녀의 목을 휘감으며 정확히 기도에 칼날을 갖다대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저항했다. 목 부위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든 것 같았다. 그러나 몸부림과 비명은 잠시----. 차 안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체를 지하실로 옮긴 후 차 안부터 청소했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시트와 깔개가 깔려 있어 그것들을 소각하자 차체에는 씻어 낼 곳이 별로 없었다. 감호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 무료함을 때우기 위해 과거의 살인을 떠올리며 공상에 젖어 있곤 했다. 나는 일반 범죄인과는 달리 특별취급을 당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권태가 밀려와 고역스런 순간순간이 흘러갔다. 자라는 건 턱수염과 손톱뿐인 것 같았다. 나는 손톱으로 벽을 긁어 입감 이후의 날짜 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내가 원하는 방, 그곳엔 출구가 없다. 제 2 부 죽음 2부로 넘어가면서 2부는 화자(話者)가 달라진다. 여기에서 [나]는 1부의 곽웅혁이 아니다. 화자인 [나]는 화가인 임유진이라는 여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1부의 화자인 곽웅혁이 이 소설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것은 아니다. 2부에서 곽웅혁은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본 객체로 투영된다. 성적으로 뒤틀린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대비시킴으로써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깊이 파헤쳐 보고자 한 것이 이 소설이 의도한 바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1. 광기 --인간은 누구나 가계(家系)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족쇄의 중압감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이 귀절을 마음의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골수에 사무치도록 믿어버린 나는 사람들의 인생 항로가 가계라는 방향타(方向舵)로 인해 얼마나 왜곡되고, 또 개개인의 의도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 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헌데 시심(詩心)의 색조마저 띠우고 있는 인상에 비해, 너무도 막연한 느낌이 불러 일으킬지도 모를 개념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가계의 운명'은 부분적으로 유전적, 경제적, 기질적 영향력을 반영하며 그런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허나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라 특히 심리적 효과에 국한된다. 굳이 부언하자면 프로이드(Freud)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자신의 어머니의 기억과 관련하여 두려움과 외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13살 무렵 몽정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조식(朝食) 전에 자신을 방으로 부르더니 침대 시트를 펼쳐놓고 딱딱하게 굳은 시트 위의 얼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제 너도 남자가 되었구나!'라고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심한 수치심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반감을 느꼈다는 것인데, 어머니의 그런 행위는 자신의 가장 후미진 내밀성으로 헤집고 들어와 넙적다리 사이의 성기를 잡고 흔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날 그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뛰쳐나가 불길 같은 증오를 짓씹으며 정신없이 막막해진 채 길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이 평생 동안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응어리가 되었던지, 그는 아주 오랜 후에 '내 고독한 삶의 근원은 어머니였다'라는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 알튀세르는 1990년에 72살의 짧지 않은 생애를 마감했는데, 그의 아내 엘렌느는 그보다 10년 전인 1980년 11월 16일 그의 손에 목졸려 죽었다. 알튀세르의 고백은 생각해 보면 참 기이한 일이다. 마치 하나의 인상적이고 강력한 원인이 확고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한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광기에 대해 과학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듯한 불안을 느낀다. 광기가 이성을 공격하자마자 이성은 혼란에 빠진다. 그는 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자신이 고독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비유이며 흔히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이 거만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앉아 좌담회를 할 때 보이는 진실하지 못한 여유와 회고조에 불과한 것인가? 좀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어머니에 의해 신체와 자유의 제약을 받았다. 내 또래의 가난한 집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치고받고 싸우며, 내가 모르는 그들의 세계를 알고 싶었지만, 그건 모두 철저하게 금지된 꿈이었을 뿐이다. --나는 선생님의 귀염둥이로 지목되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견디기 어려운 의식(儀式)은 오로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유일한 사교범위는 가정이었고, 말많은 어머니와 말없는 아버지 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식사, 수면, 그리고 학교와 집에서의 공부 뿐이었다. --어머니를 사로잡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내가 아닌 듯한, 진정 내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계속 가졌다...... 그건 정말 가짜였다. 왜냐하면 나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만의 욕망, 내 고유의 욕망, 그러나 실현이 불가능한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에 있지만 그러나 결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머니의 욕망 속에서만 존재했다.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했다. 이상으로 판단컨대, 그의 꿈과 욕망은 철저히 어머니의 꿈과 욕망에 의해 대치되었으며, 그런 간섭과 관여는 '성적인 것'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아마도 그가 아내 엘렌느를 죽일 때 어머니를 죽이고 있는 환상과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게 있어서 살인행위는 어머니와의 '정신적 탯줄'을 끊는 상징적 행위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의 불행은 일차적으로 어머니의 진저리나는 속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두 번째 불행은 아내 엘렌느를 죽인 후 그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건전한 상식의 세계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만 데 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구속하는 장애물을 제거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신세계의 지평이 열리려는 바로 그 순간 자아도 끝장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알튀세르의 생애를 알게 된 것은 우연히 그의 자서전을 초역(抄譯)한 책자를 접해서였지만, '인간의 숙명'이라는-- 사람에 따라서는 패배주의적이고 늙은이의 고리타분함을 느낄 수도 있는-- 인식을 얻게 된 것은 꽤나 오래된 셈이다. 나는 회화와 조각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자체는 예술가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을 떨쳐버린다면 별로 대수로울 게 못된다. 그리고 예술가가 일반인보다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직업적인 호명(呼名) 이상의 무엇을 드러내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창조행위는 어머니의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의 반복이다'라든가 '어떤 종류의 예술이건 온전한 대상의 모습을 염원하며 그 재현(再現)의 원전은 늘 어머니의 육체이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튀세르가 마르크스 철학을 주석하거나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서가 아닌, 그 무엇이든 좀더 창조적인 예술에 종사했다면 어머니의 촘촘한 그물같은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내를 살해하는 파국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 아쉬움은, 그것이 반드시 알튀세르를 읽고 느꼈던 바여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흔히 정신병자로 취급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을 낳게 했다. 하지만 동정심과 연민만이었다면 그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억척스러움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초현실주의자들(Surrealist)의 기법에 흥미를 느껴왔는데,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 행복을 알지 못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위 앙드레 브르통이 말하는 '꿈'과 '현실'이 '초현실' 속에서 통합되리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이미 역사적으로 한계를 노정했으며 행위예술가들의 유별난 퍼포먼스 외에는 이렇다 할 영향력마저 감퇴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 이념의 공헌은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뜨린 것과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무의식의 세계에로 초대한 데 있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심리학의 시녀에 불과하다'라는 비난은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비난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미술이 발견한 최대의 기쁨이며 내가 평생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악마의 화신, 전미경(全美璟) 이제 내가 집안으로 끌어들인 망상환자(妄想患者)들에 대해 말해 보자. 그들은 도합 4명이며 현재 우이동의 별장 겸 아뜰리에에서 나와 함께 기숙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전미경을 만난 것은 작년 가을 프랑스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얼마 후였다. 그때 나는 강북의 유명한 모 화랑을 인수하는 일이 여의치 않아 꽤나 낙심하고 있었다. 시설로만 치자면 더 크고 화려한 곳을 제쳐두고 굳이 그 화랑을 사들이고자 고집한 것은 화단(畵壇)의 탄탄한 인맥들이 초년시절 그곳을 거쳐나갔다는 명성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유학생활 동안 그리고 만들었던 작품들을 전시해 수많은 비평가와 미술품 애호가들의 찬사 속에서 나 임유진(任有珍)의 귀국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발이 희끗한 화랑의 주인은 시중 시가보다 상당한 양의 웃돈을 싸들고 찾아가 설득해도 끝내 매매를 사양했다. 영예에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장사꾼 잇속으로 보따리돈과 맞바꿀 수는 없노라는 것이었다. 단호한 양심을 가진 화랑 주인 덕분에 나는 쫓기듯 헛바람이 든 나의 허영심을 깨닫게 되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 허영심의 일부는 젊은 패기 탓이었고 또 일부는 고독했던 지난 2년간을 일거에 보상받으려는 심리작용 때문이었다. 사실, 파리에 있을 때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 두어 달을 시름한 적도 있지만, 막상 서울에 오면 반갑게 맞아줄 사람 하나 없는 처지였다. 기껏해야 이혼을 한 전 남편 정도였다. 어쨌든 화랑을 사들이겠다는 의도가 꺾이자 나는 매사를 신중히 처리할 셈이었다. 그러자 콩깎지가 씌워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내가 유학길에 오르던 때와는 화단의 상황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도 그때는 파리유학을 하고 돌아왔다면 목어깨를 빳빳이 쳐든 채 행세깨나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든지 해외유학파들이 물빠진 갯벌의 조막게처럼 득실거려 화단 말석에 명함을 내밀기도 힘들 정도였다. 한때 국전(國展)은 추잡한 화가들의 이권다툼의 온상지였으나 이제는 어엿이 등단의 권위로 자리잡아 나가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엄격한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해외유학파보다는 국내파가 낫다는 소리까지 터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독불장군식으로 맞부딪칠 게 아니라 돌아가는 정세를 남의 눈으로 파악할 겸 해서 친분이 있던 대학선배를 찾아가 보았다. 그는 어느새 또래에 비해 일찌감치 대학강단에도 서고 있는 전도유망한 중견화가가 돼 있었다. 그는 나의 갑작스런 방문을 반기면서도 약간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여왔다. "난 유진이가 영영 불란서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 떠날 때도 바람처럼 훌쩍 가버리더니 이렇게 소리 소문없이 돌아오다니 섭섭해."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잖아요." "허허, 그래. 정말 반갑군!" 그는 시선을 멍하니 허공에 두며 함께 했던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가 불쑥 물어왔다. "파리에서는 아버지와 같이 있지 않았나?" "건 왜요?" 나는 불안을 느끼며 반문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파리에 간 제자 소식을 들으니 임 화백이 파리에 없다던데?" "남미로 여행 떠나셨어요. 아마 오래 계실 작정이신가 봐요. 한 몇 년 충전을 해야겠다고 하셨어요." "하여간 대단한 양반이야. 얼마 전 동경에 세미나차 들렀는데 그곳에서도 임 화백의 명성이 자자하더군. 그래, 유진이는 혼자 아예 귀국한 건가?" "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참에 눌러앉을 작정이에요." "그거 잘 생각했어. 외국 나들이가 잦다고 화가의 명망이 올라가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불란서에서 학위라도 받고 온 건가?" "학윈 받지 못했어요. 좀더 참았어야 했는데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요즘 이곳 화단 분위기는 어때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경쟁이 아주 심하지." "전시회는요?" "갤러리마다 하루가 멀다하고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어. 하지만 그 빈번함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고 있는 모양이야.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인작가가 전시회를 하면 나도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10년 전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지.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지만 인정을 받는 건 그만큼 어려워졌다고나 할까." "저도 작품 전시회를 할까 하는데 선배님이 좀 도와주시겠어요?" "작품은?" "한 20여 점 돼요. 그 중에 데라코타와 석고상이 예닐곱 점 포함돼 있구요." "작품수는 적당한데...... 갤러리는 예약해 뒀나?" "강북 쪽은 어렵고 강남 쪽에 물좋은 곳으로 아예 하나 사들일까 해요. 돈은 충분해요." 나는 그간의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다 듣고난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 나로서는 그 방법이 썩 좋다고는 볼 수 없는걸. 아마 그런 식으로 했다간 가난한 작가들의 빈축을 사기 십상이지. 그림으로 큰돈 번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해. 이곳에서 발을 붙이려면 굳이 루머를 사서 만들 필욘 없지. 더욱이나 그건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가 아닐까? 아버지의 명성과 돈을 업고 전시회를 했다고 말야." "그럼 어떡할까요?" "다들 하는 식이 가장 좋아. 누구나 무명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일단 적당한 갤러리를 예약한 다음 비평가와 원로작가 한두 명을 모셔와 평가를 받는 게 무난하지. 그 일은 내가 협조해 줄께." "고마워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허망하게도 그날로부터 3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뜰리에에서 내 작품을 미리 감상한 그 선배의 평은 너무나 가혹했다. 한 마디로 수준미달이라는 것이었다. "아니 이것들을 작품이라고 만든 거야. 난 그래도 유진이가 대학교 다닐 때 교내 미술상을 받는 적도 있고 해서 수준이 엔간한 줄 알았지. 불란서 유학까지 갔다 온 친구가 이 정도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도대체가 기본이 안돼 있어. 유화는 드로잉부터 차근히 다시 배워야겠는걸. 데라코타나 석고상도 그래. 대체 표현하려는 주제가 뭔지 통 모르겠어. 아무래도 이번 전시회는 미루는 게 낫겠어. 적어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생각이라면 말이야." 그러고나서 그 선배는 바쁜 약속이 있기나 하듯 내 변명 한 마디 들어주지 않고 휑하니 가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도 그가 작품의 평가에는 극히 인색한 성품이라는 풍문이 자자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 일로 지레 주눅이 들어 전시회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한동안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인해 몸둘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모를 당했다는 불쾌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괴롭힌 것은 갑작스레 계획이 무산됨으로써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무료함과 따분함을 여하한 처치하는가였다. 나의 장래에 대해 대화를 나눌 가족도 없고 일손마저 한가한 처지라 눈을 뜨는 아침부터 베개에 고개를 파묻는 취침 전까지 오늘은 시간을 어떻게 죽여 없애느냐가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앞치마를 내두른 주부가 되어 콩나물을 씻느라 바쁠 옛친구들을 찾아가는 것은 왜 그런지 썩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만난 여자가 전미경이었다. 나는 동숭동의 대학로에서 페르 라케르크비스트 원작의 '바라바(Barabbas)'라는 연극을 막 관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밤의 장막은 어둡게 내려 앉았고, 평일이라 거리는 붐비지 않았다. 나는 연극이 주는 메세지를 음미하며 마로니에 공원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연극의 주제는 '인간의 삶은 토르소(Torso)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미완성품이다'라는 것이었다. 연극은 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신(神)은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숨겨지며 그래서 인간에겐 희망도 절망도 궁극적일 수 없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모른다. 그저 그것을 추구할 뿐이다'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연극은 주인공 바라바가 로마의 화재를 부추겼다는 죄명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많은 선량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아주 강렬하게 내 감정을 환기시킨 것은 '절망도 궁극적일 수 없다'라는 사상이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더불어 내세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오로지 탄생에서 죽음으로 뻗은 악몽으로 나아간다는, 따라서 도무지 희망의 부스러기를 찾긴 어렵다는 염세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희망이 없다, 라는 것은 절망일 것이므로 나는 은연중에 절망이야말로 궁극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극 '바라바'에선 그것이 부정되고 있었다. 하긴 신은 숨겨지는 것 이상으로 또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절망만이 궁극적인 것이라면 정의와 도덕은 어디에 기초(基礎)할 것인가? 그것은 희망의 싹에서 자라나는 열매들이지 않은가? 이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4인조 보컬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천국에 이르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을 통기타 반주로 부르고 있었다. 좀더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가자 여남은 명의 행인들이 한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관심있게 쳐다보다가 곧 시들해져서 제 갈길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기에 노래를 부르는 여자 앞에는 구경꾼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 여자는 베이지색 바바리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드리운 채 익숙하게 기타줄을 튕기며 노래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단정하지 못한 인상이 강했다. 그 여자의 발치에는 1미터쯤 되는 모금함이 세워져 있었다. 흰 켄트지로 조잡하게 발라붙인 모금함 위에는 개스등이 놓여 있었고 바람결에 출렁대는 빛이 붉은 사인펜으로 쓴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합시다!'라는 문구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나는 종교단체의 흔해빠진 모금행사로 생각하고 재빨리 천원 한 장을 넣은 뒤 돌아서려 했는데, 노래를 그친 그 여자가 목청을 돋우어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은 거짓입니다! 우린 휴거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예수의 궤변에 기초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빛의 천사인 루시퍼입니다! 그 분이야말로 앞으로 다가올 세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분만이 권능의 화신이시며 모든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얼마 있지 않아 예루살렘 어딘가에 솔로몬 성전이 재건되면, 그 성전에 놓인 왕좌(王座)에 그 분이 앉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세계의 왕이 되어 세계를 통치할 것입니다. 새 시대의 메시아 만세! 사탄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공원의 밤공기를 찢을 듯한 그 여자의 만세 삼창이 내 발목을 그 자리에 고정시켜 버렸다. 그 여자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재빨리 알아차린 행인들은 투덜거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사탄 만세라는 말에 욕지거리와 침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약간 어정쩡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외침이 계속되었다. "그 분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분이시며 따로 하느님을 섬길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자이며......"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우르르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리는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달려와서 다짜고짜 바바리의 여자를 내동댕이 친 후 모금함과 기타를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사탄을 부르짖던 그 여자는 가까스로 고통스런 몸뚱이를 추스려 세워 분별없는 무리의 난행에 맞서려 했으나, 도리어 그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저 미친년도 이번 기회에 단단히 손을 봐줘야 해!" 누군가가 그렇게 충동질을 하자 기타와 모금함에 집중되었던 거센 발길질이 그 여자에게로 옮겨갔다. 나와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행인들은 영문을 몰라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는데, 그 여자가 일방적으로 당하자 내 옆에 서 있던 20대의 청년이 보다못해 한 마디 했다. "이봐요! 거 너무 하지 않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난폭하게 다루면 되겠소?" "모르면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당신 일이나 신경써!" 무리중에 체격이 우람한 자가 나서서 눈을 부라리며 떡 버티고 서자 청년은 금세 꽁무니를 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다른 사람도 그의 기세에 움찔하며 물러섰다. 나는 아무래도 거기에 있는 겁쟁이들이 의협심을 발휘해 줄 것 같지 않아 파출소를 찾아나섰다. 파출소는 찾지 못하고 교통경관을 데리고 그 장소에 다시 왔을 때 무법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여자만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자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교통경관은 나를 만류하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정할 가치조차 없어요! 안 그래도 저 여자 언젠가 한 번 혼쭐날 줄 알았어요. 사탄숭배자라고 해서 인근 교회에서 몇 번인가 진정이 있었어요. 신성을 모독하니까 경찰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이에요. 우리야 딱이 적용할 법이 없어 그냥 불러서 교회에서 진정이 들어왔으니 자제해 달라고 경고했었죠. 그러기를 수차례-- 그러나 실성끼가 있어서인지 우리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사이에도 교회에선 자꾸 압력이 들어오고......" 사정을 들으니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교회에서 행동대원을 동원해 따끔한 맛을 보여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을 당한 시민을 못본 척 지나칠 셈이에요? 그러고서도 민중의 지팡이란 소릴 들을 자격이 있으세요?" 나는 그렇게 교통경관을 다그치고 부추겨서 그 여자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갔다. 교통경관은 그 여자를 응급실의 침대에 뉘어놓고 나서는 얼굴에 떫은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다행히 부상 정도는 경미했다. 허벅지와 얼굴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을 뿐 골절 같은 큰 이상은 없었다. 치료중에 그 여자는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다가 의사의 호된 꾸중을 듣기도 했는데, 그 동안 자세히 관찰한 바로는, 전반적으로 단정치 못한 느낌은 머리도 감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눅진한 기름이 껴 뒤엉긴 머리카락에서는 마늘 썩는 냄새가 났고 바바리에도 여기저기 때가 앉고 얼룩이 져 있었다. 그 여자는 수중에 전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내가 치료비를 지불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나의 호의에 대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는 것에는 못내 섭섭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병원문을 나서며 내가 말했다. "갈 데는 있는 거예요?" "......" 그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꿀꺽 메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를 냈는데, 그건 울음을 참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알수 없게도 나는 이 여자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를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친절의 한도로 보았을 때 제 정신도 아닌 것 같은 여자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욕구가 못말리게 나를 충동질해서, 나는 그 여자를 속속들이 알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닭 모를 감정의 과장과 앞뒤없는 강렬한 흥분이 나를 드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래 저녁식사는 했느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도 입 다문 조개처럼 묵묵부답이었으므로 아예 그 여자를 레스토랑으로 끌고 갔다. 그 여자는 나의 적극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지못해 레스토랑까지 따라온 그 여자는 주문한 함박스텍이 날라져오자 걸신이 들린듯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식사를 다 마치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름이 뭐죠?" "저, 저요?" "그래요. 아가씨 말이에요." "제 이름은 전미경이에요." 포만감 탓인지 뜻밖에도 말투가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난 임유진이라고 해요. 헌데 아까 보니까 모금을 하시는 것 같던데 연말에 고아원 같은 곳에 기부라도 할 셈인가요?" 나는 모른 척 눙쳐보았다.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에요. 아무렴 중요하구 말구요. 몇 백배나 중요한 일이죠." 그녀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솔로몬 성전을 건립하는 데 보탤 거예요. 헌데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아 참, 모금함! 내 기타! 그러고보니 제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건 제 전재산이나 다름없어요." 그 여자는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서둘러 식대를 지불하고 그 여자를 뒤쫓았다. 난행의 현장에는 부숴져 볼품없는 판자대기로 변한 기타의 울림통만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누군가가 집어갔는지 모금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기타의 흩어진 조각들을 쓸어모으더니 애지중지 가슴에 끌어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흐느낌이 진정되었을 때 나는 그 여자를 가까운 벤치로 부축해 갔다. 새벽에 서리라도 내릴 듯이 밤공기에는 습기가 차 있었고, 그 습기는 짙은 안개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공원을 에워싸고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에워쌌다. 그 여자가 몹시 떨고 있었기에 나는 자판기를 찾아 커피를 두 잔 뽑아들고 왔다. "식기 전에 마셔요. 몸이 한결 따뜻해질 거예요."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세요." "아까 그 사람들이 왜 미경 씨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한 거죠?" 나는 그녀의 온순한 대꾸에 용기를 얻어 물었다. "그들은 절 증오해요. 두려움 때문에 절 미워하는 거예요." "그들이 왜 미경 씨를 두려워할까요?" "새 세상이 도래하면 자기들이 박해를 받아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새 세상의 주인이 될 분은 사탄인가요?" "아아-- 당신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광채를 발하며 진지해졌다. "당신은 천상의 비밀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 분은 불원간 새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지을 성전의 옥좌(玉座)에 군림하시게 될 거예요. 그땐 세상이 발칵 뒤집어져 핍박받는 자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좌에 오르게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 분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이렇게 저에게 베푼 친절을 그 분이 외면하실 리가 없어요." "글쎄요, 난......" 나는 그녀의 만족스러워 하는 미소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전 당신 같은 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요. 당신은 저를 도와주실 수 있죠? 그쵸? 그래요! 당신은 그 분의 계시를 받아 저를 돕기 위해 이렇게 오신 거예요." 그녀는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몸을 내 코앞으로 불쑥 내밀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 이걸 봐요. 이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언니에게만 보여주는 거예요." 바바리와 수트의 앞섶을 열어젖힌 여자의 목에는 소뿔로 만든 해골 두 개가 장식된 십자가가 걸려 있었는데, 그 십자가는 거꾸로 된 십자가였다. "이건 사탄의 숭배자임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길 봐요." 그 여자가 목걸이를 걷어올리자 이번엔 젖가슴 위의 평평한 곳에 숫자 666이 선명히 문신 돼 있었다. 내가 그 숫자를 확인하자 그녀는 음산한 웃음을 머금으며 자기과시를 하듯,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라고 중얼거렸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망상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으면서도 그녀가 보이고 있는 신뢰의 감정을 손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배신감에 미쳐 날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일그러진 영혼이 드러내는 편집성에 호응함으로써 그녀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자신을 사탄의 추종자라 믿게 된 남 모를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루살렘에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고 세 세상의 통치자가 오시는 날 미경 씨는 무엇을 얻게 되죠?" "전 그날 아버지를 돌려받게 돼요." 그녀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망령(亡靈)들에 미혹되어 가출했어요.가사를 팔아 교회에 헌납해야 당신의 영혼이 구제된다고 믿고 집을 뛰쳐나간 거죠.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요. 성전의 권좌가 완성되는 날 아버지를 돌려받게 될 거라고 그 분이 말씀하셨어요." "어머닌?" "어, 어머닌 안 계세요." 그녀는 별안간 더듬기 시작했다. "안 계시다뇨?" "하여간 안 계세요! 어머닌 이번 일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 여자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는데,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커피가 쏟아졌다. 커피물은 그녀의 바바리 자락을 적셨고 나는 황망히 수건을 꺼내 옷자락을 닦았지만 무안하게도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며 저만치 걸어갔다. 그 여자는 둔중하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말밤나무 가지 위로 가로등빛이 비스듬히 새어들어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는 놀라 뒤따라온 나를 향해 발작적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언니는 날 도와야 해요! 그건 그 분이 명령한 언니의 의무예요!" 이렇게 해서 전미경과의의 만남은 인연의 고리로 맺어졌는데 전미경이 진짜 무슨 영험스런 계시를 받아 나에게 일러주었기에 집안으로 끌어들였다면 나 또한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며 기껏해야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하리라. 전미경이 갈 곳이 없다는 인간적인 동정심에 더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원인 모를 어떤 욕구에 충동되어, 하지만 친구들이 왜 미친 여자를 데리고 사느냐고 묻는다면 살바도르 달리의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달리는, 그것을 착란된 연상이나 판단에 대한 비판적이고 조직적인 객관화에 기초를 두는 비합리적 인식의 자연발생적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 어려운 개념 정의보다 그 방법을 통해 편집광 환자로 하여금 외적 세계의 여러 가지 양상을 의혹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일시적으로 보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치료하고자 한다--을 적용해 보기 위해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오해는 없기 바란다. 나는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미친 사람에 대해 내가 보기 드물게 무감각한 것도 아니다. '미친'이라는 형용사적 규정은 분별력이 눈꼽 만큼도 없는 개념이며 그것은 우리가 '미친 사람'들을 냉랭하게 외면해도 도덕적인 자책감을 전혀 느끼게 만들지 않는 구실과 방패막이 역할을 해왔다. 그 형용사처럼 우리가 무치하고 뻔뻔스러운 존재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어휘도 없다. '미친'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불구가 된 우리의 양심이 여과없이 반영되어 있다. '누군가가 미쳤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더럽고 오염된, 그래서 가능한 한 멀리하고 싶은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미친 사람'들을 비정상적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며 우리들의 정상적인 건강성을 지키기 위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인색(吝嗇)을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몰지각한 인식과는 달리 놀랍게도 정신병자의 일부, 특히 편집광(偏執狂) 환자는 어떤 의미에서 극히 정상적인 건강의 소유자라고 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정신이나 신체의 각 기관에는 아무 고장도 없지만, 다만 일반인과는 아주 다른 세계에서 생활하고 행동할 뿐인 것이다. 편집광 환자는 환시나 착란된 시각을 갖는--침대가 무한정 길어지고 날아가는 파리가 참새 만큼 커지고 시간이 정지하거나 거꾸로 가는 것으로 느낌--불안한 정신분열증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심지어 일반인이 배워야 할 장점마저 갖고 있다. 편집광 환자는 굴복과 패배를 모른다. 그들은 자기의 욕망대로 세계를 지배하고 움직이려는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다른 정신병과 편집광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능상태에 사로잡힌 정신'이며,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더 덧붙인다면 사고의 '완전한 조직화'이다. 후자는 편집광적인 망상이 오직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만 나타남을 의미한다. 편집광 환자는 전능상태로 인해 비상한 확신을 가지며, 그 비상한 확신이 공인된 경험이나 합리적인 추리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믿음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공통성을 갖는다. 전미경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편집광 환자였다. 그녀는 사탄의 도래를 추호의 의심없이 믿고 있으며, 그것이 터무니없는 믿음이라는 수많은 반증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해도 요지부동이라는 점, 그리고 사탄의 힘을 빌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오리라는 엉뚱한 발상마저 편집적이었다. 그녀는 내 별장에 머물면서 자신이 주인이며 내가 시종이기라도 하듯 명령을 내릴 때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자신이 사탄의 일개 숭배자가 아니라 스스로 사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증오하는 대상은 한결같이 휴거를 믿는 목회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타락시켰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에 두 번, 아침에는 동쪽의 계명성(啓明星)을 향해 저녁에는 서쪽의 태백성(太白星)을 향해 알 수 없는 의식(儀式)을 20분 가량 올렸는데,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사탄은 루시퍼이며 루시퍼는 금성(金星)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루시퍼(Lucifer)는 라틴어 루시엘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원래는 라파엘, 미카엘, 가브리엘과 함께 하느님을 떠받드는 그룹에 속한 빛의 천사였다. 이들 중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았던 루시엘은 아름다움과 찬미로 하느님을 기쁘게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만에 빠진 나머지 오직 하느님만이 전능하다는 점을 부정하고 스스로 완전한 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스스로 영광을 취하리라던 루시퍼는 감히 하느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사야서 14장은 루시퍼의 파멸과 타락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계명성아(Lucifer),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 하지만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 루시퍼는 적그리스도로서 때가 오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활동하게 된다. 사실 그 악의 세력은 벌써 은연중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카 후서, 2장 7-8절) 전미경은 자신이 그 세력의 중추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사소한 몸짓이나 하찮은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그런 악령스런 기운을 불어넣길 원했는데, 알고 보니 거꾸로 된 십자가와 해골 표식 외에도 쌍도끼, 박쥐, 수갑 같은 자질구레한 사탄의 상징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레드 제플린의 '천국에 이르는 길' 또한 순수한 종교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사악한 사탄의 음악이었다. 그녀가 가르쳐준대로 그 음악의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서 들어보니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여기에 사랑스런 나의 사탄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사탄은 우리의 주님이다...... 나는 그에게 666이라는 숫자를 줄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속였다...... 나는 사탄과 동거하기 때문에 사탄을 찬양한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해괴한 것들, 대체 그녀는 왜 사탄을 추종하게 된 것일까? 사탄의 힘을 빌어 가출한 아버지를 찾는 것이 그녀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 몇 주 동안의 관찰과 분석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고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성과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과거를--나는 심부름 센터에 용역을 주어 뒷조사를 시켰다--알게 되면서 막연하나마 그녀가 처한 상황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법률 계통의 하급 공무원의 외동딸로 중산층의 경제적 바탕 위에서 고3 때까지 무난한 생활을 해왔다. 모든 것이 그저 평범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삶이었지만, 불행한 가정은 아니었다. 가정에 불길한 변화가 찾아든 것은 나쁜 친구의 꾐에 빠진 어머니가 춤바람이 나 급기야는 젊은 사내와 눈이 맞아 가출을 하면서부터였다. 침례교도였던 아버지는 아내의 불륜을 감당하기에는 심성이 너무 나약했다. 그는 그 충격으로 전보다 더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들었고 아내를 가정의 품으로 돌려달라고 새벽마다 성체를 배령하며 빌고 또 비는 열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론 평생 동안 교회 문턱을 나서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욥의 절규가 그랬듯이 자신에게 그런 망칙한 시련이 닥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1년이 지나도록 아내에게서 소식조차 없자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전능의 하느님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무용지물의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무렵, 그는 곧 그리스도가 공중재림하여 휴거가 이뤄질 것이라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고 안내문을 보았다. 침례교의 지루하고 답답하던 처방과는 달리, 그는 모르핀 주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뜨였다. 현세계의 파탄은 무엇보다 그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타락한 자신의 가정이 파괴되었는데 세계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독실했던 믿음을 가졌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가 손가락 마디까지 의존해 왔던 신을 위해서도 세상은 멸망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휴거설을 주장한 교회에 들락거린 지 채 3주일이 되지 않아 그는 재산을 전부 정리해 가출했다. 전문대학 의상학과에 다니던 외동딸 미경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경이는 아버지를 찾아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강권했으나 매번 허탈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이모집에 잠시 머무르다가 그것마저 여의치가 않자 변두리 달동네의 악취나는 손바닥만한 단칸방으로 세들어 나왔다. 그리고 구로공단의 염색공장에 취직을 해 혼자 근근히 생활하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에 다시 매달렸는데, 언젠가 교회 사람들로부터 심하게 폭행을 당한 후 오랫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아버지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직장을 뛰쳐나온 것은 6개월 전이지만 언제부터 사탄에 심취하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체적으로 절름발이가 된 저간의 가정 사정이 미경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연 미경의 정신상태는 전적으로 부모의 가출로 인한 상처에 불과한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반민중적인 허위의식으로 해석하길 좋아하듯--그들은 죽음의 감수와 찬미마저 보수적 정치질서에의 순응이나 굴복으로 보며, 죽음도 일종의 제도이며 정치적인 가치선택이라고 생각한다--나도 프로이드 심리학의 준거틀로 정신적인 문제의 뿌리를 다루길 좋아한다. 내가 보기엔 미경이의 편집광은 가정의 외형적 파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억압된 여성적 외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색욕화(色慾化)된 부모와의 관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녀의 집요한 대화 거부로 피상적인 짐작밖에 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실마리로 착안한 것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녀가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화들짝 놀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의 벤치에 종이 커피를 들고 앉았을 때 내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녀는 왜 '어머닌 이번 일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른 것일까? 그녀는 왜 지레 겁을 먹은 듯이 어머니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려 한 것일까? 그녀의 부정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어머니와의 관련성이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그 관련성은 그녀의 뒷조사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가정파탄의 원인이 어머니의 바람끼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에서 그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언어의 꼬투리를 물고 늘어진다는 비난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말한 '이번 일'은 사탄을 추종해서 '아버지를 되돌려받는 일'이며 바로 그 일에 어머니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고 애욕의 경쟁상대로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녀의 과민반응은 의식의 세계로 튀어나온 불경한 느낌을 서둘러 무의식으로 돌려넣는 방어본능 이외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결국 그것은 삼각관계에 있는 여자가 부끄러운 관계를 서둘러 발뺌하여 부정하는 것과 같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삼각관계에 있는 여자가 모든 것을 의식의 수면 위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경은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역시 아전인수격이라는 비아냥을 무릅쓰고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녀는 내 집에 온 이래 하루에도 몇 번인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한 때는 '빛의 천사'였으나 '하느님'보다 더 높아지려다가 '하늘'로부터 쫓겨나 '지옥의 왕'이 되었다. 처음 이것은 '이사야서'에 적혀 있는 사탄의 내력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곰곰 생각한 끝에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 때는 '사랑받는 외동딸'이었으나 '어머니'보다 더 높아지려다가 '집'으로부터 쫓겨나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내 해석이 옳다면 미경의 편집광의 원인은 아버지를 독차지하고 싶은 욕구가 불러일으킨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에 있다. 다행히 어머니가 불륜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그 죄의식은 상당 부분 경감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가 파멸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은 되살아났을 것이고 그 증오심과 더불어 죄의식도 되살아났다. 사탄이 예루살렘의 권좌에 앉는 날, 그녀는 아버지를 되돌려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승리해야 가능할 것이므로, 그녀의 쾌감은 사악한 쾌감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녀의 쾌감은 죄의식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교만에 빠져 하느님께 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어머니의 고유권한을 정신적으로 침범함으로써 무의식속에서 죄의식을 잉태했다. 악이 선을 지배할 때 어둠이 광명을 물리칠 때 적그리스도 사탄의 통치가 시작될 때, 그녀의 죄의식은 사면을 얻게 된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무의식이 의식을 뒤덮어버림을 의미한다. 그날이 오기까지 그녀는 오늘도 하루 두 번 계명성과 태백성에 경건한 의식을 드리는 일과를 잊지 않고 있다. <2권으로 이어짐>